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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읽는공대생 Jun 06. 2019

화장

김훈 단편소설




 최근 들어, 일 주일에 세 번 씩은 꼭 뛰는 습관이 생겼다. 아침 6시 경 일어나서 30분정도 정신을 차린 다음, 채비를 하고 휴대폰 날씨 어플로 미세먼지 수치를 확인한 뒤, 달리기에 적합한 환경이라고 나오면 트레이닝 복을 입고 30분의 시간을 정해서 뜀박질을 한다. 내가 조깅을 습관처럼 하게 된 것은 운동을 전혀 손도 안 대신 아버지의 점점 야위어가는 모습을 몇 년 째 지켜봐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제부터 아버지의 병세가 많이 심각해지신 탓에 서울대병원으로 호송되었고, 지금은 경과를 지켜보기 위해 호스를 끼운 채로 병석에 계신다. 뼈밖에 안 남은 몸으로 거동조차 힘든 와중에, 얼굴색은 점차 생에 대한 갈망을 잃고 있다는 걸 노골적으로 보여주듯 회색을 띠고 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의 모습은 어찌 이토록 지켜보는 것조차 힘든 것일까. 가장 가까운 인간의 모습이 점차 시들어져가는 와중에, 새로운 생의 활력에 갈증을 느끼는 것이 과연 부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일갈할 수 있을까. 그걸 몇 년 째 감수했다면,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김훈의 ‘화장' 에서 주인공은 화장품 회사에서 상무로 근무하고 있으며 만성 방광염으로 자주 고통을 호소했다. 터질 듯 무겁고 꽉찬 육체는 소변줄로 오줌을 빼내야만 가벼워진다. 그의 아내는 오랜 뇌종양 투병으로 몸이 거의 남아나지 않은 상황이며 임종 직전이다. 뼈와 가죽밖에 남아있지 않은 아내는 향긋하고 상큼하던 음식 냄새를 구린내로 느끼는, 뒤바뀐 향의 세계에서 배설물의 악취를 맡으며 연명하고 있다. 그러나 주인공은 투병중인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회사 여직원인 추은주를 몇 년간 남몰래 염두하고 있다. 추은주의 모습은 아내와 정반대였다. 그녀는 젊었고, 생기 있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으며, 자신을 꼭 닮은 아이에게 밥을 먹여줌으로써 생명력을 나눠주었다. 소설 마지막 장에서 아내는 결국 숨을 거둬 화장을 치른 후 한 줌의 재가 되었으며, 추은주는 외국으로 가는 남편을 따라 회사를 그만둔다. 삶과 죽음의 교차가 시야에서 멀어지자 주인공은 홀로 일상에 남아 깊은 잠에 들며 이야기는 끝난다.


 땅이란 정말 신비로운 자연물이다. 탄생의 시발점이 되는 동시에 생의 끝이 도달하는 마침표와도 같다. 이 땅 위에서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은 삶과 죽음 앞에서 삶을 지닌 채로 걸어다니고 있다. 일반적인 사람한테 생명이 다해 가는 모습만을 바라보며 단조로운 일상을 버텨낼 수 있냐고 질문을 한다면, 대답은 분명 열에 아홉이 같을 것이다. 그들 역시 삶을 지닌 사람들이기에 삶에 더 애착이 가고 갈망이 크리라 짐작한다. 그건 분명 자신의 생이 점차 시들어가는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토록 생명에 대한 강인한 갈망은 감히 자연스러운 발상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주인공은이 추은주를 자신의 가슴 한 켠에 염두한 까닭은 애정이 아닌 살아 있는 모습에 대한 갈망에서 기인한 게 아니었을까. 그에게 있어 삶의 지표가 된 단 한 명의 사람의 이름이 추은주였던, 그저 그런 게 아니었을까. 나 역시 아버지가 점점 야위어 가는 모습을 몇 년 째 지켜보며 가슴 한 켠으로는 더욱 건강하고 활기찬 이상향의 아버지를 꿈꾼 적이 있다. 젊었을 적 형상을 그리워하며 다시금 내 앞에 나타난다면 어찌 따르고 싶은 마음을 지울 수 있으랴. 나는 그저 애정하는 타인의 사랑을 받아 생에 활력을 넣고픈, 한 명의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태어나고, 사랑하고, 아프고, 죽는 그 모든 순간들로부터 끝맺음을 할 날이 올 것이다. 그 굴레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이 온다면, 그간의 고뇌를 고이 접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 언젠가 맞이할 화장(火葬)을 위해 우리는 다시 화장(化粧)을 하고 일상에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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