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관 작가의 "숟가락아, 구부러져라"라는 작품의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소설 속 주인공은 우연히 자기 자신에게 숟가락을 손 안 대고 구부릴 수 있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걸 사람들 앞에서 보이려고 한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번번이 사람들 앞에서 그 재능을 보이려 할 때마다 실패를 한다. 거듭된 실패는 결국 그를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게 만들고, 결국 노숙자 신세까지 전락할 정도로 파멸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재능이 진짜라는 것을 어떻게든 사람들 앞에서 보이고자 노력한다.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재능을 기어코 노숙자들 앞에서 보이게 된다. 끝내 이뤘다는 사실에 자아도취한 주인공은 눈물을 흘리며 연신 감탄을 받지만, 갑자기 노숙자 자원봉사자가 짜증을 내며 구석에 있는 또 다른 노숙자를 부른다. 그리고 자원봉사자는 그 노숙자에게 숟가락을 구부려보라고 말한다. 노숙자는 아주 쉽게 숟가락을 구부린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난다.
인간의 삶에서 어떤 것이 가치가 있다고 부를 수 있는가. 주인공에게 있어 숟가락은 어쩌면 나름의 가치가 있는 수단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나라는 존재가 있고, 그 나로서 세상과 어떻게 만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의 답을 내리지 못하는, 삶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수단일 뿐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인간의 존재의 의미는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나로서 세상을 만들어 세상을 살아가는 것으로 형성이 된다. 숟가락을 구부리는 기술은 현재 우리네 삶에는 주목이 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나에게 성장, 관계를 맺게 해 주는 본질적인 삶의 요소는 되지 못한다. 결국 주인공은 숟가락이라는 수단으로 주목받으려는 열망이 삶을 지배해버렸고, 그로 인해 사회적 관계에 대해서 소통하지 못하고 인생을 허비해버리게 된다. 이것은 절대 인간관계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허황된 목표일 뿐이다.
천명관 작가의 "숟가락아, 구부러져라"를 완독 한 뒤, 예전에 사연 공모를 주제로 그려진 웹툰이 기억났다. 웹툰의 제목은 "청춘이 청춘일 때"였는데, 그 마지막 사연이 마치 이 소설의 주인공을 대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웹툰 속 사연자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학문인 "중세 철학"을 전공한 사내였는데, 그 전공을 택한 이유는 자기가 좋아서 끊임없이 행하고자 했던 스포츠 종목이 "공부"였고, 그 세부 종목들 중 가장 자신 있고, 평생 종목으로 삼고자 했던 분야가 중세 철학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세간은 그의 공부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무용하며, 혼자 밤새 레벨 업하는 컴퓨터 게임처럼 자기만족에 불과한 행위라고 일단락 지었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정처 없이 세상살이를 이어나가는 중이다. 숟가락을 구부린다는 행위가 과연 중세 철학에 비할 바가 되는가 물음을 받는다면 물론 함부로 대답하긴 어렵겠지만, 지금으로선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이 든다.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는 본인에게 지금 본질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그것을 추구하고 있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학문이다. 하지만 중세 철학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이다. 즉, 무신론적인 과학적 사고의 관점에서 살고 있는 현대에선 이 유신론적 체계의 중세 철학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되는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어떻게 신에게 맞춰야 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가 있기 때문에 지금 우리의 삶의 어떤 영역에도 들 수 없다.
현시대의 '중세 철학'이라는 학문 자체가 숟가락과 다름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고 느껴진다. 주인공이 남들 앞에서 숟가락을 구부러뜨릴 수 있는 경지에 올랐지만 끝에는 결국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행위에 전락하여 환영받지 못했던 것처럼, 현시대의 중세 철학 역시 제법 학문의 경지에 이르게 됐지만 이미 무신론에 근거한 철학이 지배한 세상에서 신학에 입각하여 세워진 법칙들로 가득 찬 중세 철학이 마땅히 실생활에 적용하여 사용할 만한 분야가 없기에 환영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들은 숟가락을 놓지 않는다. 얼마나 안타까운 사실인가. 자신이 지금껏 꿈이라 생각하며 믿어온 존재가 결국 의미가 퇴색된, 그저 집착에 이른 허황된 꿈이 돼버린 걸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매달리고 있는, 그 안타까움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유리 겔러의 숟가락 마술이 거짓으로 탄로가 난 것처럼 자신이 지금껏 믿어왔던 명제가 거짓된 것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파헤친 끝에 거짓된 명제 속에서 기어코 스스로에 입각하여 진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진짜가 환영받을 수 있는 구실이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면, 아직까지 진짜에 왜 그렇게까지 허덕이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걸까. 그건 분명 자신이 생각한 진짜를 한 번이라도 바라보고 싶은 사람들만이 가진, 형용할 수 없는 열망을 버릴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우연히 자기 자신에게 숟가락을 구부리는 재능을 남들에게 어떻게든 보여주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