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아픔은 원인을 찾는 것이 아닌 그저 들어주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옳고 그름을 혼자서 따지며 판단을 오롯이 혼자만의 생각으로 내리는 순간, 그것은 어떤 이에게는 선동으로, 어떤 이에게는 분노의 도화선으로 시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증폭되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고, 다수의 아픔을 유발한 사건의 당사자 또는 목격자가 아닌 이상 우리는 숨죽여 그들에게 묵념하는 것이 가장 나으리라 생각한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우리 역시 사람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한 마디 발언들의 중량이 얼마나 무거워졌는지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중압감이 어디서 발현되었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음에도, 함부로 발설하지 않은 이유를, 우리는 머리로는 알아채기 힘들더라도 몸으로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날짜를 기준으로 계산하자면, 청해진 세월호 침몰 사고가 일어난 날짜로부터 벌써 1887일이 지났으며,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난 날짜로부터 벌써 8753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두 사건의 차이점을 굳이 말하자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는 원인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확실히 알고 있지만, 세월호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으로 말할 수 있다. 그렇다 한들 비수에 박힌 통증은 바뀌지 않는다. 1000일 이상의 날짜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그때 그 아픔을 여전히 가슴 속에 지닌 채로 살아가고 있다. 정부가 어떠하다, 경제가 어떠하다, 신의 계시가 어떠하다, 이런 구설들이 뒤섞인 환경에서도 결국 알고 있는 건, 이미 일어난 사건을 돌이킬 수 없고, 예방의 필요성을 알고 있을지라도 흉터는 계속 남은 채로 다가오는 시간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정이현의 단편소설 삼풍백화점은 그 아픔을 지닌 채로 살아가는 개인의 심리를 탁월하게 서술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 화자인 ‘나’는 취업준비생이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취업 준비를 위해 도서관을 드나들다가 서늘한 도서관 분위기에 싫증이 나면 ‘삼풍백화점’에 들러 머리를 식히는 습관이 있다. 어느 날, '나'는 대학교 졸업식 사진을 찍을 때 입을 옷을 사러 삼풍백화점에 가게 되는데, 그 곳에서 고등학교 동창 R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삐삐로 서로 연락하면서 '나'는 R과 점차 친해지게 된다. 하지만 '나'와 R은 우연찮은 사건을 계기로 관계가 서늘해지게 되고, 점점 만나지 않게 된다.
1995년 6월 29일, 여느 날과 같이 '나'는 삼풍백화점에 들렀다가 나오려 하는데, 오래간만에 R에게 마지막으로 삐삐로 연락을 한다. 그리고 그녀가 백화점을 나온 후 수 분 뒤, 삼풍백화점은 5분만에 그 자취를 감춘다. 붕괴된 삼풍백화점을 바탕으로 어떤 기자는 그 붕괴가 '자본주의에 찌든 인간들에 대한 경고'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낸다. 그 기사를 본 '나'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그 기자가 소속한 회사에 전화로 분노를 외친다. 그 일이 있고난 뒤 오랜 시간 후, '나'는 R의 이름을 키보드로 검색하면서 R의 것일 수도 있는 미니홈피를 들여다보며 R을 회상한다. 그리고 그 곳을 벗어난 뒤에야 글을 쓸 수 있다 말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문장 구조, 사건의 순서, 모종의 복선 이런 걸 다 떠나서 결과적으로 그때 그 사건 이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심경을 가지고 있는 지 몸소 느끼게 해 주었다. 성별, 재력, 명예 등 시선의 판단만으로 나뉘어진 계급에 따라 차등적으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을지라도, 재해는 결국 만인에게 아픔과 희생을 동반하게 만든다. 본인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사건의 원인에 대해 찾으려고 하지 않았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행동을 자발적으로 수반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 '아픔'이란 것을 그대로 느끼고자 이행한게 아닐까 싶다. 사건의 원인을 차례차례 따지며 나아가다 보면 소설 속에 나온 기자와 같은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우려가 불현듯 머리에 스친 기억이 있다. 아마 그때 자기 자신에게 느낀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오판으로 인해 망가지는 것보단 기록으로 그쳐서 회상하는 것이 더 타당한 행동이라 지금은 믿는다. 아직은, 내 시야가 올바른 판단에 가깝기까지 좁디 좁은 것을 나 자신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친한 친구가 소설을 냈다. 자신의 필명을 '황운'이라고 지었다. 무슨 의미인가 하고 물어보니, 자신의 이름에서 본뜬 것이기도 하면서 노란 구름이라는 의미를 담았다고 한다. 그걸 듣고 난 뒤, 노란색은 더 이상 잊을 수 없는 색깔로 다가왔다는 것을 깨닫게 됭다. 삼풍백화점을 검색해보니 분홍색깔을 띤 건물 사진들이 즐비해 있었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 분홍색을 결코 잊지 못하는 색깔로 남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가 노란색의 의미를 잊지 않으려 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