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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Feb 13. 2018

내 남편이 변했다

나는 여보 전문가거든!

결혼식은 12월에, 혼인신고는 1월에 했다. 나와 남편 둘다 날짜에 큰 의미를 두는 편은 아지만, 혼인신고는 기억하기 쉬운 날짜로 일부러 정했다.

1월 23일, 123은 도무지 잊을 수 없는 날짜라 믿었다. 몇 해 전 1월 23일, 나와 남편은 회사에 휴가를 내고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고 맛있는 점심을 사 먹었던 기억이다.


둘 다 기념일에 목메는 편은 아니지만, 기억하기 좋은 어떤 나날을 기념일이라 부르며 우리는 평소보다 더 즐겁게 식사를 하거나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사 먹곤 한다. 밖에서 만나지 않는 날이면 집에서 배달음식을 주문해 맥주 한 잔 걸치는 정도다. 기념일에 꼭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어제보다 오늘 더 재미있게 지낼 수 있는 날이 기념일일 뿐이다.


그런데 올해 혼인신고 기념일을 나와 남편 둘 다 잊고 말았다. 나란히 침대에 누워 잠 들 무렵에야 생각난 것이다. 나는 다급히 일어나 남편의 팔을 잡고 말했다.

“여보, 여보.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


남편은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떠보듯 말했다.

“음, 결혼기념일은 아닌 것 같은데. 혹시 혼인신고?”

“응, 맞아 맞아. 오늘이 그날이었네. 지금 생각났어.”


갑자기 저녁에 먹은 순두부찌개가 떠올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치킨에 맥주라도 먹을걸. 아니면 밥 먹기 전 서로 덕담이라도 나눌걸 그랬나. 평생 기억하자고 굳이 날짜를 정해 혼인신고를 해놓고 둘 다 잊어버리다니 조금 허탈했다.


“여보, 왠지 저녁에 순두부찌개 먹은 거 억울하다.”

“그런 것 가지고 뭐가 억울해. 결혼기념일 있는데 혼인신고 기념일은 안 해도 되지 않아?”


허걱, 하는 마음에 남편 얼굴을 들여다봤다. 남편 얼굴엔 졸음과 귀찮음이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서운해하는 내 얼굴을 보고는 곧장 일어나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내일이라도 맥주 한 잔 하자며 애교를 떨었다. 잊어버리지 말자고 공들여 날짜를 정해 혼인신고를 했던 내 남편은 어디로 간 걸까. 내 남편이 변했다.      


지난 연말, 남편의 생일이었는데 선물을 아직도 못 샀다. 예전에는 미리 한 달 전부터 선물을 골라두라고 말해두면 뭐라도 생각해내곤 했는데, 요새는 남편이 통 물욕이 없다.

늦게라도 필요한 것을 말하면 사줄 테니 생각해보라고 했다. 그래도 아무것도 없는 생일은 적적하니 나만의 쿠폰을 만들었다. 설거지 면제, 5분만, 10분만, 커피 셔틀, 심부름 등등 쿠폰을 만들어 줬다.

이 쿠폰을 남편이 얼마나 요긴하게 쓰는지 모른다. 식사 후 환기를 하며 빨리 상을 치우고 싶은 내게 ‘10분만’을 써버린다. 그럼 나는 음식 냄새가 나도 남편이 움직일 때까지 10분을 기다려야 한다. 저녁식사 준비는 내가 하고 설거지는 남편이 하는 편인데, '설거지 면제' 쿠폰을 쓰면 나는 식사 준비부터 설거지까지 저녁을 온통 책임져야 한다.


'심부름' 쿠폰을 쓰는 날은 남편의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도서관에 다녀와야 한다. ‘밥을 쏘세요’ 쿠폰도 넣었는데, 그날은 생활비가 아닌 내 용돈으로 외식을 한다. 쿠폰을 쓰는 날이면 남편은 기분이 굉장히 좋다. 나만 우거지 죽상이다.


그랬던 남편에게 며칠 전 다시 물어봤다.

“여보, 생일선물 생각해봤어?”

“응! 갖고 싶은 거 있어!”

“뭔데?”

“설거지 면제 100개, 10분만 100개.”

“여보, 너무한 거 아냐?”

“갖고 싶은 건 쿠폰밖에 없어. 빨리 만들어줘! 빨리 쿠폰 내놔!”

너무한다 너무해. 확실히 내 남편이 변했다.      


회사생활을 하던 마지막 해에 건강이 많이 상했다. 스트레스를 받은 날이면 어김없이 위경련이 일어났고, 식도염이 생겨버렸다. 목에 무언가 남아있는 느낌도 그렇고, 기름진 음식을 먹으면 곧장 메스꺼워지는 바람에 식성이 조금 바뀌었다.


그렇다고 식사를 거르면 더 문제가 된다. 위산이 계속 분비되니 메스꺼움이 더욱 격해질 수밖에. 그래서 식도염이 찾아오는 날이면 조금이라도 식사를 해야 한다. 식사는 천천히 조금씩 먹는 게 좋다. 위경련이 오는 날은 괜찮아질 때까지 소량의 죽만 먹도록 한다.


어제는 식도염까진 아닌데 속이 조금 불편했다. 요즘 신경 쓰이는 일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끼니를 거르면 더 큰 고생이 찾아온다는 것을 알기에 조금씩 떠서 천천히 먹었다. 싱겁게 만든 국물을 조금씩 마셔가며 식사를 했다. 남편은 틈틈이 시계를 봤다.


“음, 여보 식사 시간이 평소보다 느리네. 그건 오늘 컨디션이 안 좋다는 건데.”

“오, 이제 그런 것도 알아?”

“그럼, 당연하지! 여보가 식사를 늦게 하거나, 무언가 안 맞는 음식을 먹고 표정이 바뀌거나 하는 것도 다 알지. 오늘은 식사를 평소보다 2배나 걸려서 했어. 속이 안 좋은 거야. 요즘 스트레스받는 거 있어?”


나는 요즘 신경 쓰이는 일들을 이야기했다. 남편은 고개를 끄덕이고 내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앞에 앉아 계속 대화를 나눴다. 식사를 다 마칠 무렵 남편이 물을 떠다주며 처방을 내렸다.

“오늘은 몸이 안 좋으니 빨리 쉬어야 해. 씻고 빨리 누워. 필요한 건 나한테 다 말해.”


필요한 것을 얼마나 잘 해결해 줄지는 모르겠으나 굉장히 든든했다.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졸음이 쏟아졌다. 잠들기 전 남편에게 인사를 했다.

“여보, 나 먼저 잘게. 너무 졸리다. 여보도 잘 자.”


다시 남편은 시계를 봤다.

“음, 평소보다 두 시간 빨리 자는군. 역시 몸이 안 좋아. 여보가 몸이 안 좋으면 잠을 많이 자더라고.”

“자는 시간도 체크해? 여보 정말 나에 대해 다 아네.”

“그럼! 나는 여보 전문가거든!”


여보 전문가라니. 결혼 전에는 내가 얼굴이 하얗게 질리도록 아파도 못 알아채더니 이제는 잠드는 시간이나 식사 속도만 봐도 컨디션을 알아챈다. 진정 여보 전문가가 다 됐다.


여보 전문가가 있어서 나는 마음 편잠들었고, 오늘 가볍게 일어났다. 남편은 아침부터 내 컨디션을 체크했다. 역시 전문가답다. 결혼 전보다 훨씬 따스한 사람이 됐다. 내 남편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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