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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절의 주부
by 귀리밥 Feb 07. 2018

세탁기 소동

우리 생활에 세탁기가 없다면?

어느 토요일이었다. 아침식사 준비를 하는 동안 세탁기를 돌려놓고 외출 전 널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온은 낮았지만 햇빛은 부쩍 좋았던 토요일이었다. 세탁기가 한 주간 모아둔 세탁물에게 물과 액체세제를 뿌리며 깨끗해질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이런 소동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세탁실 문을 닫고 남편과 외출 준비를 하던 중 남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큰일 났어!”


화장대에서 얼른 일어나 세탁실에 가보니 난생처음 보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작은 세탁실 바닥에 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세탁기는 스스로 작동을 멈췄다. 빨리 발견한 덕에 물이 주방으로 넘칠 정도는 아니었다. 처음 보는 기호가 세탁기 액정에 떴는데, 검색해보니 물이 빠지지 않는다는 신호였다. 때마침 관리사무소에서 내보내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배수관 동파로 인해 세탁기를 사용하지 말아달라는 당부였다. 한참 세탁기를 사용하던 중에 이 방송을 들으니 몹시 억울해졌다.


일단 예정된 외출이 있으니 남편과 채비를 하고 나왔다. 우리 배수관이 잠시 막혔다면 집에 돌아왔을 때 물이 다 빠져있으려니 생각했던 것이다. 계획된 볼일을 다 보고 오후 늦게 집에 돌아와 세탁실을 열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가벼운 생각을 했는지 눈으로 확인했다. 바닥에 차오른 물은 윗면에 살얼음까지 낀 상태로 한 방울도 빠지지 않은 채였다. 나와 남편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디선가 동파가 발생하면 드라이기로 녹이라는 걸 본 적이 있어서 나는 얼른 드라이기를 가져왔다. 레인부츠를 신고 세탁실에 발을 디뎠다. 부츠를 신어도 살얼음이 낀 얼음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미치도록 발이 시렸다. 드라이기로 삼십 분쯤 배수관과 세탁 호스에 뜨거운 바람을 쐬었다. 배수관과 세탁 호스가 따스해지는 동안 내 허리는 분단의 아픔을 느꼈다.


그럼에도 세탁실 바닥의 물은 빠질 기미가 안 보였다. 허리를 펴지도 못하고 세탁실에서 빠져나온 나와 바통터치를 한 남편은 차오른 물을 퍼냈다. 많이 차진 않았지만 쪼그리고 앉아 물을 퍼내고 옮기면서 남편 역시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싶어 관리실에 전화를 걸었다. 이미 여러 집에서 물난리가 난 모양이었다. 두 시간쯤 기다려 맞이한 관리실 기사들은 다채로운 기구를 이용해 얼어붙은 배수관을 녹이고 차오른 물을 내보냈다. 그 시간 나는 허리가 아파 누워있었는데, 남편이 지켜본 관리실 기사들의 얼굴이 굉장히 지쳐 보였다고 한다.


그날로부터 하루에 서너 번은 관리사무소에서 방송을 내보낸다. 세탁기를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하루 이틀 지나면 서서히 녹아내릴 거라 생각했지만, 좀체 기온은 올라가지 않았다. 꽁꽁 얼어붙은 배수관은 겨울잠을 자는 모양이다.


하물며 방송이 나오는 데도 무시하고 세탁기를 돌린 몇몇 집이 있던 모양이었다. 저층 세대의 세탁실과 베란다에는 물이 역류하고 거실까지 물이 넘어온다고 추가 방송이 계속됐다. 베란다와 배수구를 통해 넘쳐난 물이 일상의 공간에 침범하는 광경은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졌다.


내 집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타인의 집에도 똑같은 고통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다. 이런 상황에서도 세탁기를 돌리는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조금 실망했다. 공동주택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세탁기를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방송은 계속 나오지만, 세탁물은 계속 나올 수밖에 없다. 나와 남편은 손빨래를 한 번 시도했다. 욕조에 따끈한 물을 틀어놓고 세제를 풀어 빨래를 담갔다. 손으로 조물조물하다가 발로 꾹꾹 밟기도 했다. 난생처음 해보는 손빨래가 나름 재미있다고 느꼈다.


물론 재미는 헹구기 전에 끝났다. 남편과 마주 보며 빨래를 누르는 즐거움은 헹굼의 지옥에 빠지기 직전 짤막한 혜택이었다. 헹굼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대체 왜 아무리 헹궈도 거품이 나오는 걸까? 열심히 짜도 물은 왜 계속 떨어지는 걸까? 우리 마음과 달리 빨래들은 엄청난 양의 물을 품고 짜도 짜도 계속 물이 나오는 마법을 부렸다. 이날은 허리와 더불어 팔다리에 분단의 아픔을 느꼈다.


다음날 지역 카페와 지인들에게 연락해 대안을 물어봤다. 지인 한 명이 빨래방을 이용했다기에 이거다 싶어 캐리어에 빨래를 담아 신나게 코인 세탁소로 향했다. 대기번호를 받았다. 대기시간은 6시간 이상이라고 했다. 6시간이 지난 후 와서 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그냥 돌아와야 했다. 그곳에서 말한 6시간 지난 후는 새벽 3시였다.    


I don`t know you, But I want you. 우리 부부는 영화 <원스>의 풍경처럼 청소기 대신 캐리어를 끌고 코인 세탁소를 찾아 의도치 않은 밤 산책을 시작했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코인 세탁소가 더 있었고, 기쁘게도 대행 서비스가 되는 곳이었다. 그곳에 세탁물을 맡기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1층 현관에서 바라본 아파트는 여전히 겨울잠을 자고 있었다. 마치 “나는 잘 테니 너희들은 고생 해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세탁기 하나 사용하지 못한다고 생활이 이토록 힘들어질 줄은 몰랐다. 그날 밤 나와 남편은 집을 둘려보며 없으면 안 될 물건을 이야기했다.

“겨울은 그렇다 치더라도, 여름에 냉장고 없으면 진짜 어떻게 살지?”

“노트북 없으면 진짜 답답하겠다.”

“가스레인지 없으면 정말 불편하겠는데?”

“온수매트 없으면 우리 진짜 큰일 나겠어.”


그러고 보면 세탁기가 없던 시절 손빨래를 하던 시절은 얼마나 고됐을까. 먼 옛날 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시절, 그리 멀지 않은 과거 속 각자의 가정에서 손빨래를 하던 시절을 상상해봤다. 내겐 어릴 적 엄마가 속옷과 양말을 삶아 빨던 모습도 여전히 남아있다. 세탁기를 장만하기 전 욕실의 작은 의자에 앉아 손빨래를 하던 엄마의 옆모습이 그려졌다. 세탁기 하나가 여자들의 삶을 크게 개선했다더니 이런 계기로 실감하게 됐다.


올 겨울은 그야말로 유난하다. 세탁기와 물이 빠져나가는 관이 꽁꽁 얼어붙을 정도로, 인위적으로 만든 열기는 금세 사라질 정도로 유난하다. 지금도 관리사무소는 계속 방송을 내보내며 세탁기를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고 있다. 직접 들여다보지는 않았지만 저층 세대의 고생이 상당할 것 같다.


아마 나뿐만이 아니라 동파로 고생하는 사람 모두가 매일 날씨를 확인하며 따뜻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봄을 향한 갈망이 활활 타오르는 겨울이다. 하루빨리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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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gazine 반절의 주부
반절의 주부, 귀리밥 작가의 브런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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