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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Feb 05. 2018

디어 랄프 로렌, 손보미

디어 랄프 로렌, 을 읽었습니다.

시원한 표지가 마음에 드는 <디어 랄프 로렌>이다. 다음 독서모임 지정도서였고, 서평이 마음에 들어 추천한 책이었다. 프롤로그부터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프롤로그는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전개될지 밑그림을 그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반드시 읽어야 한다.      


“시계, 시계가 필요해. 시계. 그게 있어야 해. 손목시계. 그래야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랄프 로렌으로 걸칠 수 있는 거란 말이야. 랄프 로렌은 시계를 만들지 않아. 손목시계 말이야. 그걸 생각하면 우울해져.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리는 것 같아.” 87p.     


랄프 로렌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아르바이트로 랄프 로렌을 사고, 시계가 필요하다며 영문의 편지를 쓰기 위해 종수에게 번역을 부탁한 수영. 박사학위 시험에서 떨어지고 그나마 학교에서 쫓겨나게 된 종수는 집에서 분풀이를 하듯 책상 서랍을 부수다 몇 년 전 받은듯한 수영의 청첩장을 발견한다. 그것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 계절 내내 수영이와 편지를 번역한다는 핑계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설렜으면서, 그 바람에 성적도 뚝뚝 떨어져 부모님으로부터 이런저런 조치를 받았으면서 그 청첩장을 잊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기억이란 참 힘이 없다고 느낀다. 그 당시에는 정말 죽을 만큼 힘들고, 기이하리만치 사람을 움직이는 감정이 기억으로 전이되고 나면 한없이 나약해진다.      


그 청첩장을 발견한 계기로 종수는 랄프 로렌의 발자취를 알아보러 도서관에 다니고 관련 인물들을 인터뷰한다. 과정에서 랄프 로렌을 키워준 조셉 프랭클과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조사하고 다닌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종수는 잊고 있던 수영과의 기억을 조금씩 찾아가고 낙오자가 된 마냥 우울했던 자신을 돌이켜 본다.      

이런 식으로 보든 저런 식으로 보든 저는 최악의 인간이에요. 하지만 그 잡지 기사를 읽는 순간, 저는 마치 신의 계시라도 받은 기분이었어요. 조금의 시간을 더 얻은 기분이었어요. 비겁한 말이지만 조금 더 도망쳐도 된다고 허락을 받은 기분이었어요. 257p.     


돈은 다 떨어져 가고 허름한 아파트에 서서 밥을 먹는 종수는 미국에서의 시한부를 살고 있던 거였다. 다시 한국에 돌아가면 마주해야 할 막막한 감정들은 그의 회상에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도망치는 마음으로 랄프 로렌을 좇는 모습가슴이 아팠다.      


잭슨 여사는 여전히 나를 안은 채 아까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속삭였다.

“종수, 절대-늙지-말아요. 절대로-늙지-말아.”

나는 잭슨 여사의 목소리가 저 멀리, 아주 먼 곳으로부터, 내가 한 번도 도달해본 적이 없는 곳으로부터 들려오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304p.     


책을 낼 계획이나 다시 수영이를 찾아가 랄프 로렌의 이야기를 할 계획 따위 없지만 종수는 열심히 주변 인물들을 만나고 인터뷰한다. 그리고 104세의 나이로 죽어가는 레이첼 할머니는 종수에게 늙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떠나는 이가 남게 될 이에게 애정을 담아 전하는 메시지였다.


이 단계에서 종수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수영과 섀넌, 작은 이모 등등 주변 인물들에 대해 ‘대충’이 아닌 ‘정면’으로 바라보게 된다.      


어떤 실마리가 시원하게 밝혀지며 끝나진 않지만 나는 결말이 깔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책은 랄프 로렌에서 시작했지만 랄프 로렌으로 끝나진 않는다. 몇 가지 제목 혹은 편지의 첫 시작을 추가해 쓰고 싶다.

디어 조셉,

디어 레이첼,

디어 섀넌,

디어 수영,

디어 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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