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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Feb 11. 2018

영화 <코코>, 그리고 제사

떠난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그 순간

어젯밤, 남편과 영화 <코코>를 봤다. 보자며 벼르던 그 영화를 이제야 봤다. 남편은 음악 영화로 알고 코코를 봤고, 나는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로 알고 봤다. 둘 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음악 영화에 치우치지 않았고, 사후세계지만 현실과 균형 있는 비율은 가진 이야기도 맞았다. 미국의 애니메이션은 아무리 이국의 느낌을 살려도 미국의 색깔이 진하다고 느꼈는데, 이 영화는 멕시코 특유의 색깔만 잘 담아낸 것 같아 마음에 들기도 했다.     

 

남자 주인공인 미겔이 아닌 치매에 걸린 마마 코코가 영화 제목인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것은 끝까지 봐야 알 수 있다. 미겔이 음악을 못 하게 하는 가족들 몰래 무대에 서려고 애쓰는 때가 마침 ‘죽은 자의 날’이었다. 죽은 자의 날을 맞아 이승에 가족들을 만나러 오는 죽은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온다. 생명체가 죽으면 무지개다리를 건넌다고 표현하는데, 외국도 비슷한 표현이 있는 모양이었다.      

‘죽은 자의 날’은 우리나라로 치자면 차례나 제사와 비슷하다. 멕시코의 가정에서 제단에 돌아가신 가족의 사진을 올려놓고 그들을 떠올리며, 그들이 좋아했던 음식을 바치는 것. 우리의 제사와 많이 닮아있다.      


일단 나는 우리나라의 제사 문화를 몹시 싫어한다. 돌아가신 분이 와서 음식을 드신다는 발상 자체가 신뢰성 0이다. 상을 차리고 그 앞에 절을 하는 것도 부자연스럽다. 마치 음식에 절을 하는 것 같아서다. 동태전과 산적이, 윗부분을 깎은 과일, 탕국이 내 윗사람 같다. 그렇다고 상 앞에 돌아가신 분이 와계신지 확인도 안 된다.     

 

게다가 제사와 차례를 잘 지내면 조상 덕을 본다던가, 후손이 잘 풀린다던가 하는 것도 너무 억지다. 제사를 잘 지내서 잘 풀린다면 뭐랄까 그건 조상과 후손의 기브 앤 테이크 같다. 내가 상 잘 차렸으니까 내게 행운을 좀 달라는 식이라니. 그야말로 예의와 거리가 멀다. 제사로 성공을 바라는 추한 요행이다.      


내가 생각하는 우리나라의 제사와 차례는 가부장제를 굳건히 하고 집안의 없던 권위를 만들기 위해 근대에 생긴 풍습이다. 음식을 만드는 일을 여성에게 몰아놓으면 남자들은 재미없는 텔레비전을 보거나 술이나 마시며 권위를 세울 수 있다. 성별의 차이를 상하 관계로 가장 쉽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다. 그렇게 ‘전통’이란 이름을 붙여 제사를 지내면 그 집안의 권위는 웬만해서 깨지지 않는다. 남자 그리고 어른을 위한 전통이다.      


그런데 이게 잘 살펴보면 조금 우습다. 각 집안에서 만드는 제사 음식은 전통으로 내려오던 레시피와 많이 달라져 있다. 집마다 만드는 방식이 다르면서 서로 ‘이렇게 해야 한다’, ‘이게 전통이다’라며 시시비비를 따진다.      


게다가 제사와 차례상에 올라오는 전, 떡, 과일, 국 같은 음식도 생전 가족이 싫어했던 메뉴라면? 만약 가족을 추억하고 추모하기 위한 상이라면 ‘제사 음식’의 목록을 굳이 지킬 필요도 없는 것이다. 또 과거 제사음식은 남자들이 만들었다는데, 지금은 왜 굳이 여자들에게 몰아붙여 갈등을 만드는 걸까.      


굳이 제사가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명절이면 모여 명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세상 좋아졌다고는 하나 여자가 주방에서 일하고 그 때문에 부부가 싸우고, 고부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서로 흉한 꼴을 보는 것은 제사를 떠나 명절이면 흔히 생기는 문제다. 명절을 얼마 앞둔 지금, 나도 썩 편한 입장은 아니다.      


<코코>에서 죽은 자의 날이 되면, 제단을 만들고 음식을 바친 가족의 조상들이 다리를 건너 이승으로 나온다. 가족들이 올려둔 음식을 먹고 즐거워한다. 대단한 음식은 아니다. 가족이 츄러스를 올려놨다고 좋아하며 들어가는 영혼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여기서의 죽은 자의 날은 돌아가신 가족을 추억하고 이야기하는 게 중심이다. 이승에서 가족들이 죽은 사람을 떠올리고 이야기를 나누고 전승해야 영혼도 저승에서의 삶을 이어갈 수 있다. 이승에서 잊힌 사람은 저승에서 소멸된다. 그런 의미에서 죽은 자의 날 제단에 올리는 사진과 음식은 매우 중요하다. 음식의 가짓수, 레시피, 누가 만드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사진과 음식을 준비해 떠난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그 순간이 중요하다.      


이런 종류의 제사라면 나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늘 궁금했다.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저승에서 만나셨을지, 할머니보다 조금 먼저 세상을 떠난 삼촌을 만난 할머니가 놀라진 않으셨을지, 그곳에서 우릴 지켜보고 계실지 말이다. 할아버지가 먼저 자리를 잡고 계실 저승은 편안한지, 늘 관절이 아파 고생하셨던 할머니가 거기서는 통증 없이 잘 지내실지도 궁금했다.      


나는 그분들을 생각하며 그분들이 좋아했던 음식 몇 가지를 마련해 일 년에 한 번 상에 올린다면 얼마든 할 수 있다. 타인에게 음식 만드는 노동을 떠넘기며 ‘도리’ 운운하지 않고 그분들을 추억하고 싶은 나 스스로 정성으로 제사를 준비한다면 말이다.      


여자니까, 며느리니까 주방에서 명절 필수 메뉴를 고생스럽게 만들고, 남자들은 거드름을 피우는 명절 문화를 가진 집안이라면 다 같이 <코코>를 보면서 반성 좀 해야 한다. 고작 음식, 고작 제사 때문에 가족끼리 미워하고 원망하고 흉보는 게 오히려 먼저 떠난 가족을 슬프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중요한 건 형식과 음식이 아니라 떠난 이를 추모하고 잊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코코>에서는 저승에 온 이승의 아이를 돌려보낼 때 조상이 축복을 하면 된다고 나온다. 축복이라는 게 별 것 아니다. 건강히 잘 지내라고, 가족을 소중히 하고, 가족이 늘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며 축복한다. 조상이라면 당연히 후손에게 이런 축복을 보내리라 생각한다. 제사 음식을 차리든 안 차리든 말이다. 나를 기억해주는 이승의 후손과 먼저 떠나온 저승의 조상이라면 당연한 축복이다. 내게 축복이있다면, 선량하셨던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지켜보고 계실테니 나쁜 짓 하며 살면 안 된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영화 제목이 코코인 것은 치매 걸린 할머니 ‘코코’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고 죽음이 가까워오면서 더 이상 전승하고 추억하기 어려운 영혼의 슬픔이 영화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딸이었던 코코가 성장하고, 구두 만들기를 배우고, 자식을 낳고, 늙어 가면서 더 이상 후손에게 전승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있다. 그것을 잊지 않아야 가족이다.      


가족은 그렇게 별 것 아닌 추억도 소중히 여기고 남겨줄 유일한 존재들이다. 자식 도리, 며느리 도리에 꽁꽁 메여 숨 막히는 명절을 보내는 대신 다 같이 모여 떠난 이를 추억할 수 있는 설 명절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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