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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Aug 30. 2017

부끄러운 기억

나만 부끄러운 건 아니죠?


길을 가다 넘어져서 치마가 뒤집어졌다고? 대화중에 콧물이 나왔다고? 데이트 중 음식을 입가에 줄줄 묻혔다고? 그런 예사스러운 부끄러움 말고, 자신만 느끼는 부끄러움 없을까?


누구나 부끄러워할 만한 그런 일들 외에도 혼자 있을 때 떠올리기만 해도 양볼이 붉어지는 부끄러움이 있다. 시간이 꽤 흘러 우연히 떠올라도 ‘그때 왜 그랬지’, ‘이런 모자란 사람!’이라며 스스로의 엉덩이를 때려주고 싶은 부끄러움이 내겐 분명 있다.


대학교 때의 일이다. 대학을 1년 늦게 들어가서 함께 공부하는 동기들은 나보다 한 살이 어렸다. 언니, 누나 소리를 들으며 함께 지냈다. 그중 한 남동생과 수업을 마치고 길을 걷고 있었다. 아마 도보로 15분 정도 떨어져 있던 전철역까지 함께 가게 된 상황이었을 것이다.


무언가 소소한 이야기를 하며 걷던 중, 가로수가 심어진 흙바닥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백 원짜리 동전보다는 크고 은색을 띄는, 오백 원 동전의 모양이었다. 십 원, 오십 원이면 줍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오백 원은 얘기가 다르다. 오백 원이 두 개 모이면 천 원. 천 원이면 김밥이 한 줄. 오백 원은 작지만 존재감이 강한 통화의 일종.


나는 그 오백 원을 꼭 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발걸음이 빨라지고, 시선은 동그라미에 고정됐다. 그래도 이야기는 쉼 없이 이어갔다. 하지만 가로수 밑 흙바닥에 도달한 순간 그 동그라미는 은박 종잇조각이란 것을 확인했다. 나도 모르게 입으로 아, 하는 탄성이 나왔다. 그때 옆에서 남동생이 말했다.


“누나, 저거 돈인 줄 알았지?”

그러고는 피식 웃는 게 아닌가!

“아냐. 그런 거 아냐.”

“오백 원으로 본 거 맞잖아.”

“아, 아니라니까!”

“아까부터 그것만 봤잖아. 오백 원 같으니까!”

“니두 봤냐?”

“아니, 누나 아까부터 말하는 내내 눈이 저기에 박혀있으니 봤지. 오백 원 엄청 갖고 싶었나봐?”


남동생이 얄밉기도 했지만, 오백 원을 줍고 싶어서 내내 노려보며 걸었던 모습 하며 그걸 또 곁에 있던 사람 눈에 걸려서 놀림까지 당하니 굉장히 창피했다. 집에 도착해서도 계속 생각났다. ‘누나, 저거 돈인 줄 알았지’라는 말이 귓가에 쟁쟁 울렸다.


차라리 당당하게 ‘응, 오백 원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라고 답한 뒤 도도하게 정면만 보고 걸으며 갔으면 놀림을 피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날 밤잠을 설치고, 다음날 아침 학교에서도 그 동생이 또 놀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한 번은 인터넷 쇼핑몰에서 카디건을 구입했다. 큼직한 사이즈의 루즈핏 카디건인데 모델이 단추를 한 개씩 밀려 채웠다. 실수가 아니라 연출을 일부러 그렇게 했는데 자연스러우면서 멋스러웠다. 카디건을 받자마자 나는 그 모델처럼 하나씩 단추를 밀려 채우고 회사에 갔다.


오늘은 나의 옷차림이 자연스러우면서 멋스럽고, 독특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패션피플이란 자부심에 설렜다. 회사 건물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 만난 옆자리의 회사 선배가 어깨를 톡톡 쳤다.

“단추 하나씩 밀렸어.”

선배는 나에게 굉장한 호의를,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를 기대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오늘 아침은 정말 니트가디건이 필요했던 날씨.

하지만 나는 패션피플이란 자부심으로 단추를 밀려 채웠기 때문에 당당히 설명했다.

“일부러 이렇게 채운 건데요.”

선배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게 일부러 한 거라고? 그냥 제대로 채우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쇼핑몰 모델이 이렇게 채웠는데 이쁘더라고요. 저는 괜찮은 것 같은데요?”

“사진과 현실의 차이가 있잖니? 사진에선 이뻐 보여도 현실에선 글쎄다 싶은 것. 그게 딱 그 단추네.”

선배의 말투가 조금 버릇없다고 느껴졌는데 마침 출근하는 국장님까지 내게 호의를 베푸셨다.

“안 기자, 단추가 밀렸네. 옷 고쳐 입게나.”


아침에 하나씩 세어가며 밀려 채운 단추를 다 풀고, 똑바로 채우면서 나를 쳐다보는 옆자리 선배의 시선은 피부과 레이저보다 뜨거웠다. 단추마저 날 부끄럽게 만들려고 작정한 듯 빡빡하게 굴었다.




단추 사건보다 좀 더 뻔뻔한 일도 있었다. 평소 잘 하지 않던 공부를 하던 중에 엄마가 내 방으로 들어와 이것저것 잔소리를 하신 날이 있다. 나는 공부하던 자세를 바꾸지 않고 책상에 앉아있었고, 엄마는 그 뒷모습을 보며 바닥에 앉아 뭐라 얘길 하던 중 내 책상 밑을 목격하셨다.

거기엔 한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 생긴 먼지가 똘똘 뭉쳐 동그란 실 몽당이처럼 응어리져있었다.

그땐 나를 포함한 자매들이 각자의 방을 청소하도록 정해진 상태였는데, 청소를 유독 싫어하는 나는 버티고 안 하던 중이었다. 엄마는 고함을 쳤다.

“너 이게 뭐니! 아니, 얼마나 청소를 안 하면 먼지가 뭉쳐있어?”


하, 나는 사춘기인걸. 이 상황에서 대들고 소리를 질러도 질풍노도의 시기 취급밖에 더 받겠나.

“일부러 안 한 거야. 일부러 먼지 둔 거라고.

“왜! 왜 먼지를 둬! 더럽게 왜!”

“따뜻해서!”


내가 왜 그 순간에 먼지 덩이를 따뜻하다고 우긴 건지 나도 잘은 모르겠다. 패브릭에서 발생되는 먼지니까 뭉치면 솜털 같진 않아도 얼마간이라도 따뜻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

지금 생각해보면 은근히 창의적인 발언이었는데, 엄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가셨다. 이 먼지 사건은 20년이 흐른 지금도 명절, 친지 모임에서 거론되는 나의 부끄러운 기록이다.


이렇게 부끄러움의 길을 걸어온 내게 아직도 부끄러운 것이 있다면 요구르트 아줌마와의 대화다. 길을 걷다 보면 요구르트 차를 몰고 가는 요구르트 아줌마들을 간혹 볼 수 있다. 요구르트 아줌마는 걷기도 하고, 차 위에 올라타 천천히 이동하기도 한다.


그 차 안에는 신선한 요구르트와 치즈 등이 담겨있을 테고, 두어 개 사다가 집에서 먹고 싶은 충동이 있긴 한데 허공을 바라보며 이동하는 아줌마를 불러내는 첫마디가 내겐 너무 부끄럽다.


‘저기요’라고 하면 아줌마가 자신을 칭하는지 모를 것 같다. ‘아줌마!’라고 해도 길엔 아줌마가 많아서 어렵다. ‘수고하십니다’라고 하면 단속 나온 공무원인 줄 알고 왠지 도망치실 것 같다. 어떤 말로 불러야 자연스럽게 아줌마를 멈춰 세우고 요구르트와 치즈를 살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은 잘만 불러서 사는데 나는 부끄러워서 아직 한 번도 사지 못했다.


예전 회사에서 동료직원은 넉살 좋은 말투로 ‘아줌마, 여기요옹~’을 외치며 요구르트를 사곤 했는데. 무뚝뚝하게 부르기엔 조금 미안하고, 살갑게 부르기엔 능력이 부족해서 요구르트 아줌마를 아직도 대하지 못하고 있다. 그 맛있다는 치즈과자를 사려면 요구르트 아줌마를 꼭 불러 세워야 할 텐데.



인스타그램 이렇게 넣는 거 맞죠?

귀리밥의 인스타그램

, 이것도 뭔가 부끄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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