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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Aug 25. 2017

친해지고 싶지 않아, 중국술

첫 회식 날 중국술은 내게 목욕값 아니 모욕감을 줬다.


앞서 양고기에 대한 생각을 썼는데, 나보다 양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내 남편이다. 남편은 주 1회 정도의 주기로 “오늘 양꼬치에 한 잔 어때?”를 묻는다. 여기서 한 잔은 중국술을 말한다. 이과두주 혹은 고량주 등의 중국술 말이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한다. 양꼬치에 맥주는 괜찮은데, 도무지 마실 수 없는 게 중국술이다.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한 곳은 완구회사의 해외사업부였다. 그곳에서 무역업무를 맡아하게 된 나는 입사 한 달째에 첫 회식을 하게 됐다. 회식 이틀 전쯤 상사로부터 날짜를 통보받았다. 회사에는 당일에 회식하자는 매너 없는 사람들도 더러 있는데, 이왕이면 회식은 일주일 전쯤 날짜를 조율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그도 안 된다면 이틀 전 통보면 양호하다고 생각이 든다.




첫 회식을 앞두고 나는 신경 쓰이는 게 많았다. 그 자리에서 술을 많이 마셔야 할지, 못 마신다고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옷은 어떻게 입어야 할지. 이틀 내내 끙끙거리고 고민을 했다. 신입사원 환영회 겸으로 한다니까 내게 몇 가지의 질문은 날아올 터. 질문에 대응하기 위한 취미, 가족사항, 업무와 관련한 향후 계획 등등 모범답안을 준비하고, 의상도 평소보다 좀 더 신경 써서 골랐다.


그리고 긴장되는 회식 날 아침. 나보다 들떠 보이는 건 상사들이었다. 아침부터 “오늘 첫 회식이네.”, “술은 잘 마시나?”, “오늘 회식해서 좋겠네.” 등의 말들을 자꾸 거는데, 어쩐지 방긋거리고 웃는 얼굴을 보면 나보다 상사들이 더 즐거워하는 듯했다. 뭐랄까, 어차피 가면 뭘 할지는 다 알고는 있지만 괜히 현장학습 전날의 설레던 그 모습이랄까? 나이 지긋한 상사들도 어릴 적 모습이 아직 남아있구나, 싶었다.


업무를 정시에 마치고 다 함께 차를 나눠 타고 회식 장소로 향했다. 회식 장소는 늘 내 위의 대리가 잡는 모양이었다. 식당 두어 군데 전화를 하고 그중 중식당으로 회식 장소를 정한 모양이었다. 대학 졸업 때까지도 나는 고급 중식당에 가본 적이 없었다. ‘집에서 먹는 밥 외엔 모조리 해로운 것’이라고 생각이 박인 엄마 덕에 나는 외식 경험이 거의 없었다. 엄마는 탕수육 하나도 주문하지 않고 직접 만들어 주시는 분이었다.


회식 장소인 중식당은 아주 깔끔한 테이블보에 반짝거리는 식기가 세팅되 있었고, 벽면과 천정에서 붉고 노르스름한 조명들로 장식돼 있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상사들과 동료들은 내게 질문을 했다.


“자네, 술 좀 마시나?”

“잘은 못 마십니다(모범답안).”

“중국술 좋아하나?”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사실).”

“빼갈 좋아하나?”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사실).”


나는 중식당에 가본 일이 거의 없어 중국술 역시 알 턱이 없었다. 다시 다른 상사가 질문했다.


“회사 한 달 정도 다녀보니 어때?”

“열심히 배우고 있는데 재밌습니다(모범답안).”

“자네, 술은 좀 마시나?”

“잘 못 마십니다(아까 못 들었나?).”

“중국술은 좀 해?”

“마셔본 적이 없습니다(아까도 대답했는데).”

“중국집에 왔으면 고량주 한 잔 해야지.”

“네에...”


방금 내가 문답한 내용을 못 들었는지 다시 같은 얘기가 반복됐다. 하, 좀 이상한데? 이번엔 건너편 대리가 물었다.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 어색하지?”

“아닙니다. 다들 잘 해주시는 걸요(모범답안).”

“술은 좀 마시나?”

“잘 못 마십니다.”

“중국술은 좀 해?”

“안 마셔봤습니다.”

“여기 왔으면 중국술 한 잔 해야지. 이과두주 어때?”


마셔본 적 없다고 세 번을 말했으나, 결국 질문과 답은 정해져 있었다. 게다가 빼갈이 뭔지 이과두주가 뭔지 알 길이 없었다.

생각해보니, 왜 다들 내게 술 질문만 하지? 내 환영회라며! 나에 대해 궁금한 게 없는 건가 싶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평소에 무엇에 관심이 많은지, 어떤 업무를 재밌어하는지, 주말엔 뭘 하며 지내는지, 그런 것은 왜 아무것도 묻지 않지?


그 이후에도 두어 명의 상사가 내게 또 주량과 중국술 질문을 했다. 그리고 같은 답과 질문을 반복했다. 회식은 그저 술 질문만 있는 건가, 하며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이윽고 요리와 술이 나왔다. 하, 내가 계속 주절거리며 들은 술이 저 녀석인가. 병도 쪼끄만 게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저것에 왜 자꾸 상사들은 집착하는 걸까.


가장 윗 상사가 전원에게 술을 한 잔씩 따라줬다. 나도 한 잔 받았다. 술을 받으며 이름을 듣긴 했는데 뭔 소린지 몰라서 일단 잠자코 있었다. 상사가 건배사를 하고 다 같이 잔을 들었다. 평소 소주를 마실 땐 늘 첫 잔을 원샷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역시 원샷을 했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왜 아무도 나를 말리지 않았나요.

첫 잔을 시원하게 삼키고 잔을 내려놓은 나를 모두 신기하게 쳐다봤다. 아마 도수 높은 그 술을 단 번에 마신 나를 걱정 반, 신기함 반으로 쳐다보는 듯했다. 그 짧은 순간 내 코에서 향수 같은 것이 폭포수처럼 터져 나왔다.


이렇게 독하다니! 너무 독해서 술이 목으로 넘어가지 않고 코를 통해 뿜어져 나온 모양이었다. 알코올의 강렬함과 이름 모를 독한 꽃향기가 코로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처음 겪는 이 독함이 입에서도 기체로 뿜어져 나왔다.

다행히 이건 맥주. 중국술은 환생 후 도전할 예정.

중국 전통 벽화를 보면 굵직한 용이 코와 입에서 불을 뿜으며 날아오르는 모습을 본 적 있는데, 아마 독한 술을 마셔서 그랬나 보다. 얼굴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나를 보고 상사들은 바로 앉아있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였다.

그들도 아뿔싸 싶었을 거다. 나이가 지긋한 상사의 건배사가 무색하게, 신입사원이 처음 비운 술을 코와 입으로 뿜는 광경이 그들에게도 꽤나 무안했던 것이다.


일단 식사를 좀 들고, 술을 천천히 하라고 권했다. 뜨거운 국물을 마셔보라는 이도 있었다. 그날 나는 신경 써 입고 간 연핑크 블라우스에 짬뽕 국물을 젓가락처럼 길게 흘렸다. 그날 회식은 중식당에서 마무리됐다.


생각해 보면 첫 직장의 상사들 치고 나쁘지 않은 이들이었다. 아저씨들이 갖고 있는 특유의 순박함, 사회초년생에게 독한 술로 아는 척하고 싶었지만 묘하게 실패한 회식의 기억을 공유한 그들이었다. 집에 가서 아내들에게 말했겠지. 우리 부서 신입이 말이야, 오늘 술을 마셨는데…


그때로부터 벌써 10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나는 중국술과 친해지지 못했다. 여전히 중국술을 마시면 코에서 향수가 흐르는 기분이다. 남편은 그 향이 좋아서 마신다는데, 난 아직도 그 맛에 반하지 못해 맥주를 홀짝 거린다. 남편이 언젠가 직장 상사로 회식에 참여를 하면 후배 직원에게 중국술을 권하게 될까? 왠지, 남편만은 권하지 않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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