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리밥 Jul 06. 2018

여자의 우정이 얄팍하다는 말

골판지 박스보다 얄팍해지는 나의 우정아

친구 사이에 주고받는 의리는 가끔 엉뚱하게 발현될 때가 있다. 의리라는 이름을 걸고 허덕일 정도의 돈을 빌려준다거나, 상대가 민폐를 끼치는 데도 허허실실 참아주기도 한다. 의리가 있고 우정이 돈독하기에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할 때도 적지 않다. 친구에게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만사 제치고 달려가고, 친구가 슬퍼할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기도 한다.


어쩌면 내게 손해일 지도 모르는, 정확히는 손해라는 걸 알면서도 받아주는 일과 노동이 있다. 그건 친구와 ‘서로 친구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관계를 쌓아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생긴 기대와 믿음이 있어서다.


20대였던가. 주변에서 종종 그런 말이 들렸다. 여자들은 우정이 얄팍하다고, 결혼하면 끝이라고 말이다. 남자들은 결혼해도 똑같은데 여자들은 결혼하면 친구 관계 다 끊긴다고 했다. 남자는 여자와 달리 의리가 있다나.


근거 없는 낭설이라 여겼다. 적어도 내게는 해당되지 않을 일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친한데, 이만큼 아끼는 친구들인데 고작 결혼 때문에 끊어진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친구들도 늘 그랬다.

“우린 결혼해도 계속 연락하고 놀러 다니자.”

“우린 결혼해도 일 년에 한 번씩 여행 가자.”

“애 낳으면 각자 남편한테 맡기고 오기!”


미혼 시절 얼마나 많은 여행지를 친구들과 누볐는지 모른다. 싸늘해지는 겨울이면 한 주 걸러 가방을 챙겨 스키장에 갔다. 한참 친하게 지내던 무리의 친구들은 내가 끓여주는 닭볶음탕을 그렇게 좋아했다. 스키장에 가면 콘도에서 나는 늘 닭볶음탕을 끓였고, 친구들과 소주를 마셨다.


그뿐인가. 여름이면 바닷가로 놀러 가고, 무박 2일 관광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잘도 다녔다. 멀미가 심한 나지만 친구들과 통영에 가느라 멀미약을 먹고 긴 시간 버스를 탄 적도 있고, 조금씩 돈을 모아 해외여행도 다녀오곤 했다.


지리적 특성 탓에 섬에 본가를 둔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 친구들과 배를 타고 여기저기 쏘다닌 기억도 많다. 그 많은 추억들을 어떻게 종이에 옮기고 글자로 기록하겠냐만, 그 끝없을 것 같은 추억이 어느 시점에서 차츰 줄어든 건 사실이다.


정말 인정하기 싫었지만 사람들이 낭설처럼 떠들어대던 그 얄미운 말이 사실로 바뀌고 있었다. 20대 후반부터 친구들이 줄기차게 결혼을 했다. 주말이면 하루에 두 명이 결혼하는 바람에 연달아 예식장을 가는 날도 적지 않았다. 결혼식 중에 부모님께 인사하는 순간에 친구가 울면 나도 울었다. 대체 몇 번의 부케를 받았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친구의 축복스러운 날들이었다.


그리고 그 축복의 행사가 끝나면 연락 한 번, 만나서 밥 한 번 먹기가 참 어려웠다. 결혼하면 다들 어찌나 바빠지는지 메시지를 보내도 답변을 받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통화 가능한 시간도 제약이 있었다. 만나려는 약속을 잡으려면 몇 달은 실랑이를 해야 했다.


친구들은 결혼 후 격주로 서로의 부모에게 방문하고 익숙지 않은 친척들의 집안 행사에 방문했다. 거를 것을 거르지 못하고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행사를 구분 못하는 시절. 나라고 다르진 않지만 말이다.

그래서 참 서운했다. 그렇게 친하게 지냈으면서 친척 행사며 시가며 친정이며 다니느라 나는 뒷전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이를 낳게 되면 더욱 멀어졌다. 아이를 낳은 친구들은 늘 나를 집으로 불렀다. 눈매가 해맑은 어린아이를 안고 어르고, 대화의 맥을 따박따박 끊는 옹알이와 울음에 대꾸하며 놀았다. 친구가 힘들어하면 내가 아이를 어르며 놀아줘야 했다.


허기가 지면 배달음식을 주문해 나눠 먹으며 친구의 한탄을 들었다. 얼마나 잠을 못 자는지, 할 일이 얼마나 많은지, 시어른들은 얼마나 서운하게 하는지 등등. 하지만 그 시간도 길지 않았다. 친구의 남편이 오기 전 너무 늦지 않게 친구 집에서 나왔다. 죄지은 것도 없고 불편한 사이가 아님에도 이상하게 친구의 남편이 오기 전에 나와야 할 것만 같았다.


20대 후반부터 그런 만남이 반복됐고 친구들의 아이가 더 큰 후에는 그나마 있던 만남도 줄었다. 수차례 그런 방문이 있었고, 30대가 넘어가면서 아이를 낳은 친구가 집으로 부르면 나도 모르게 방문이 꺼려졌다. 나는 친구들과 말끔하게 차려입고 밖에서 놀고 싶었다. 유명하다는 맛집에 가고 나풀거리는 찻집에서 차를 마시고 싶었다. 가끔 화려한 주점에 가서 술도 취할 정도로 마시고 싶고, 별 일 없이 쏘다니며 서로의 옷을 골라주고 아이쇼핑을 다니고 싶었다.  


서른둘의 겨울에 내가 결혼할 무렵엔 대부분의 친구들이 유부녀였다. 그 말은 더 이상 내 주변에 연락이 줄기차게 닿는 친구가 많지 않고, 밖에서 만나 놀 친구도 없으며, 다들 육아에 허덕이느라 내 사정과 소식은 뒷전이었다는 뜻이다. 하루하루 씁쓸했지만 그랬다.


그래서 오기가 생겼나 보다. 나는 친구들의 연락이 오면 일단 받았고 만날 일이 있으면 조금 기다리더라도 시간을 맞췄다. 고민거리가 있다며 전화가 오면 몇 시간이라도 받아 들고 이야기했다. 내가 느낀 씁쓸함 그 서운함을 다른 친구들에게 무심하게 넘기고 싶지 않았다.


거의 다 결혼했지만 주변에 아직 미혼인 친구가 몇 있는데 그중 한 명이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아직 기혼도 아닌데 그렇게 약속 잡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서로 보자고 말을 주고받은 지 좀 된 상태여서 날을 잡았다가 친구가 한 달 미루는 바람에 다시 날을 잡았다. 내가 사는 파주에서 친구가 사는 인천으로 가기로 했다. 결혼 준비가 바쁠 것 같아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친구는 뜬금없는 소리로 나를 아프게 했다.

“나 남자 친구랑 있어야 해서 너랑 차 한 잔 마시려고.”


밥도 거르고 친구 시간에 맞춰 이동하려던 나는 입이 딱 다물어졌다.

“너한테 맞춰서 날짜도 잡고 시간도 맞췄는데 차 한 잔 하고 간다고? 야, 좀 서운하다.”


친구는 대꾸가 없었다. 가까운 동네에 살면서 일주일에 6일은 만나 놀며 서로를 끔찍이 아끼던 친구였다. 하지만 친구는 기혼자의 패턴에 일찌감치 젖어들기 시작한 건지, 오래전 친근했던 모습을 탈탈 털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렇게 바쁘면 됐어. 나중에 보자.”

“그럴래? 그럼 나중에 내 남편이랑 같이 보자.”


약속을 미루는 모양도 마뜩지 않은데 그것마저도 본인 남편과 셋이 보자는 말에 속이 더부룩했다. 그래도 친구니까 이런 사소한 면도 덮어줘야겠지만 한편으로 ‘대체 나는 얼마나 더 너그러워야 하나’ 싶었다. 나는 이제 그만 너그럽고 싶었다. 친구가 서운할까 봐 내색도 못하고, 이 외로움을 말도 꺼내지 못했던 시간들이 미워서 나는 그만 너그럽고 싶었다. 이렇게 멀어지면서 각자의 가정에만 몰입하는 우리 친구 사이가 지는 노을 같아서 그저 슬펐다.


긴 말도 필요 없었다. 만나면 전해주려던 결혼선물을 박스에 싸서 친구 집으로 택배를 보내버렸다. 선물을 포장했던 박스는 참 두껍던데, 나와 친구들의 우정은 왜 자꾸 얄팍해지는 건지. 누군가 젊은 시절 낭설을 떠벌리는 척하며 내게 ‘우정아 얄팍해져라’ 하며 저주라도 걸어둔 건가. 어디 가서 소리라도 꽥 지르고 싶었다.

이전 01화 고향 기행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