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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Sep 15. 2019

책가방 들어주는 어른

그 손길은 얼마나 아이에게 힘이 될까, 거름이 될까.

가볍게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횡단보도 앞에서였다. 단지 바로 앞 횡단보도에 나와 열네다섯 살 쯤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서있었다. 비가 오락가락하던 가을장마의 나날. 신호가 바뀌고 여학생과 나는 같은 방향으로 길을 건넜고, 여학생이 향하는 앞으로 중년의 여인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여학생의 할머니일까, 혹은 조금 늦게 아이를 낳은 엄마일까. 마른 체구에 촘촘하게 펌을 한 중년의 여인은 서둘러 여학생에게 다가가 책가방을 받았다. 아주 익숙한 행동과 순서였다. 방과 후의 책가방이 당연히 중년 여인의 몫인 듯했다.


책가방을 받아내는 여인과 마찬가지로 여학생도 늘 그래 왔듯 가방을 넘기며 웃었다. 그렇게 두 여인은 만나자마자 조잘거리며 걸어 나갔고,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멘 여인은 뭐가 그리 대견한지 여학생의 등판을 둥둥 치며 데려갔다.

나와 같은 단지에 사는 주민인 듯했다. 같은 방향으로 걸으며 의도치 않게 그 뒷모습을 지켜봤고, 그 둥둥거리는 손길에 이를 무렵엔 나도 모르게 “아!”하고 조그맣게 탄성도 질렀다. 중년 여인의 그 손길이 얼마나 아이에게 힘이 될까, 얼마나 거름이 될까. 학교에 다녀온 아이에게 수고했다며 책가방을 들어준 덕에 아이는 얼마나 키가 더 클까, 어깨는 얼마나 반듯하게 자랄까, 마음은 또 얼마나 곱게 여물까.


손녀인지 자식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자손을 그리 아끼고 어여쁘게 키우는 중년 여인의 웃음과 그 내리사랑을 흠뻑 받아 자라는 여학생이 몹시 예뻐서 나는 탄성도 지르고 부러워도 하고 모르는 그들에게 은근한 축복도 던지며 집으로 돌아왔다.

부쩍 옛 생각이 났다. 예고 없이 내리는 비에 한 번쯤은 엄마가 와주길 바라며 학교 입구에서 서성이던 날. 학교에서 교과서를 잔뜩 받아 돌아오는 육중한 책가방을 누군가 들어주길 고대했던 날. 아무 이유 없더라도 누군가 곁에 있어주길 바랐던 수많은 날들.


책가방 들어주는 이 하나 없이 자란 내가 못난이라 생각지는 않지만 가끔 아쉬운 과거를 들춰본다. 애는 알아서 큰다는 말은 세상 까다롭게 살지 말라는 어른들의 경험치일 수 있다. 하지만 알아서 큰 아이가 가끔 외로워질 수도 있음을 그 어른들은 알까? 그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알아서 크기보다는 사랑받고 크길 바라는 나의 오지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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