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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Sep 03. 2017

생애 첫 돼지국밥

순대 없는 순대국밥의 다른 이름


돼지국밥을 아시는지? 돼지국밥이라. 그 이름을 들어본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 언젠가 주변의 누군가가 경상도 지역의 여행하고 와서는 “돼지국밥 먹고 왔어!”라고 약간 자랑할 때, 그 이름을 들었을 뿐이다.


세상에, 돼지국밥이라니. 돼지고기가 얼마나 많이 들 있기에 이토록 자신 있게 돼지국밥이란 이름을 가진 걸까. 고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굉장히 축복받은 메뉴일 것. 나는 먹어본 적 없는 돼지국밥을 상상해봤다. 국물의 색은 아마 붉은색 아닐까? 그 위에 도톰하게 썬 돼지고기들이 차분하게 옆으로 누워있는데, 그 아래에도 돼지고기가 가득 차있는 모습. 이름에 ‘돼지’를 메인으로 넣었다면 엄청난 고기 양과 맛이 있는 게 아닐까?


궁금해서 인터넷에 돼지국밥을 검색해봤는데 상상한 모습과 비슷하기도, 또 각각 이미지마다 생김이 너무 달라서 무엇이 맞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마치 상상의 동물 해태와 같이 머릿속 돼지국밥은 몸집을 불려 가며 나를 설레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대화 중 돼지국밥 이야기를 했다.

“회사 앞에 돼지국밥집이 있는데 사람들은 다 맛있대. 난 싫은데.”

“뭐라고? 지금 돼지국밥이라고 했어?”

“어, 돼지국밥.”

“그게 서울에도 있단 말이야?”

“응, 회사 앞에 있어. 왜?

“아니, 나 그거 안 먹어봤거든. 궁금해서.”

“그럼 이번 주에 한 번 먹으러 올래?”


나를 설레게 한 돼지국밥은 이미 몸집과 존재감이 굉장해져서 더 이상 만나지 않고는 버틸 수 없을 만큼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경상도 지역에 여행을 가야만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서울에 있다니 놀랍고 반가웠다. 업무와 관련해서 촬영을 갔다가 일찍 끝난 어느 날, 남편 회사 앞으로 찾아갔다. ‘오늘 만나러 갑니다, 돼지국밥’


조금 일찍 도착한 나는 카페에서 소이라떼를 마셨다. 잠시 후에 돼지국밥을 만나야 하기 때문에 디저트를 먹거나 부담스러운 음식을 먹으면 안 된다. 아침식사 후 점심도 거른 상태라 배가 고팠지만 참을 수 있었다. 그만큼 간절하고 궁금했다. 돼지국밥은 얼마나 돼지고기가 많기에 그런 이름으로 태어날 걸까? 자신감 넘치는 녀석 같으니.




이윽고 남편의 퇴근. 우리는 반갑게 재회했다. 남편과 돼지국밥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난 얼굴이 붉어지기까지 했다. 도착한 곳은 프랜차이즈 국밥집. 간판에 유명한 외식업계 CEO의 얼굴과 ‘*** 돼지국밥집’이라고 쓰여 있다. 돼지국밥집이 프랜차이즈로 운영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정말 여기야?”

“응, 여기야.”

“돼지국밥이 프랜차이즈로 운영될 만큼 대중적인 음식이야?”

“이거 되게 많은데?”

앗, 되게 많다는 돼지국밥집의 간판을 태어나서 처음 봤다니. 일단 입장.


메뉴판 가장 위에 유난히 굵은 폰트로 ‘돼지국밥 6,000원’이라고 쓰여있었다. 가격을 본 후 마음이 흔들렸다. 돼지국밥이면 돼지고기가 엄청 많을 거고, 근데 육천 원이면 타산이 맞는 건지 의심이 됐다. 계산대에 서있는 주인아주머니의 얼굴을 봤다. ‘돼지고기 가득한 이 요리를 정말 육천 원에 팔아도 괜찮으신가요?’라고 텔레파시를 보냈다. 물론 아주머니는 알아채지 못했다. 일단 나는 돼지국밥을 주문하고, 남편은 간장 메밀국수를 주문했다.


가게 직원이 깍두기와 밑반찬을 갖다 줬다. 설레는 마음에 밥 먹기 전 깍두기를 세 조각이나 먹었다. 한 5분쯤 지나자 직원이 간장 메밀국수와 돼지국밥을 들고 다가왔다. 드디어 만났다. 몇 년간 이국의 서신으로 만나던 낯 모르는 사람의 흔적처럼, 단서를 조금씩 흘리는 미스터리물의 마지막 퍼즐을 끼우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나는 돼지국밥을 받았다.


돼지국밥.

하얀 국물에 돼지 부속물 몇 개가 떠다니고 파와 들깨가루가 뿌려져 있었다.

“여보, 이게 다야?”

“돼지국밥이잖아.”

너무 당연하게 받아치는 남편.

“이거 순댓국이잖아.”

“이게 돼지국밥이야. 순대국밥이랑 돼지국밥이랑 비슷한 거야.”

뭐라고? 그걸 왜 이제 알려주는 거지?


숟가락으로 돼지국밥을 휘이- 저어봤다. 뽀얀 국물에 돼지 부속물이 대여섯 개 들어가 있었다. 차슈처럼 도톰한 돼지고기가 덮여있거나, 국물 가득히 돼지고기가 있진 않았다. 마지막 퍼즐은 나를 슬프게 했다.


이건 그냥 평범한 순댓국집에 가서 “이모, 순대 빼고요”라고 하면 나오는 평범한 순댓국이었다. 순댓국에는 두 가지 주문 방식이 있지 않은가. “이모, 순대 빼고요”와 “이모, 순대 만요”라고.


평소 늘 먹던 ‘순대 뺀 순댓국’을 돼지국밥이라고 부르는 줄은 상상도 못 한 나는 순대 뺀 순댓국을 먹고 굉장히 속은 기분으로 가게에서 나왔다. 돼지국밥을 먹기 위해 경상도 여행까지 생각한 나로서는 허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너무 분해서 남편과 맥주를 마시러 갔다.


돼지국밥에 대한 허탈함은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오랫동안 남편이 다른 여자와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받은 것을 알아챈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아침 내내 컨디션이 저조해 늦잠까지 잤다.


그날 이후 나는 돼지국밥을 깨끗이 잊었다. 다시 돌아와서 “나 변했어."라고 해도 절대 넘어가지 않을 만큼 완전히 잊었다. 아무리 내게 변했다고, 새로운 모습이라고 변명한들 “넌 그저 순대 뺀 국밥이야!”라고 매몰차게 상처를 입힐 것이다. 멋진 외모를 뽐낸다한들 “너 들깻가루 밑에 허당이잖아!”라고 실체를 폭로할 수 있다.


돼지국밥 이후, 이상하게 순대국밥이 자주 먹고 싶어 진다. ‘행복은 늘 가까이 있는 것’이라는 고루한 교훈이 이번 일에 적용되는 것이 분명하다. 결국 돼지국밥은, 순대 뺀 국밥 그 녀석은 우리 동네에 흔하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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