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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Sep 03. 2020

회사 아닌 다른 길을 찾아도 내 삶은 망하지 않는다

들어가며.

잡지사에 다닐 때였다. 메인으로 발행하는 잡지와 부수적으로 만드는 작은 신문이 있었는데, 신문은 품이 크게 안 들어서인지 디자인을 프리랜서 디자이너에게 맡겼다. 그 디자이너는 일주일에 한 번 아침 일찍 출근해 오후 늦게까지 작 업을 하고 돌아갔다.


30대 중후반으로 보였던 디자이너는 말수가 많지 않았다. 업무상 용건이 있으면 간간이 말을 주고받았고, 함께 점심식사를 할 때도 있었지만 역시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동료들이 인심이라도 쓰듯 회식에 초대하면 그녀는 점잖게 거절하고 귀가하곤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사람이니 손님 같기도, 같은 매체를 만든다는 입장 때문에 한 식구 같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동료와 상사들의 태도는 일관성이 없었다. 디자이너가 돌아가고 나면 항상 뒷말이 오고 갔으니 말이다.

“일주일에 한 번 나오는데 받는 돈은 나랑 비슷하대요.”

“우리랑 같은 직원이면서 친근하지가 않아. 좀체 사근사근함이 없다고.”

“어차피 직원인 건 똑같은데 매일 출근시키면 안 돼요?”

“아, ◯◯씨는 좋겠다. 나도 일주일에 하루만 일하면 좋겠다.”

“결혼했다던데 애 키우려고 프리랜서 하는 거겠죠?”


생각해보면 그 디자이너는 자신의 개인사나 프리랜서를 하는 이유, 하다못해 작업 액수도 입 밖에 꺼낸 적이 없는데 사람들의 말속에서 상상은 몸집을 불려 갔다. 그런데 말과 인식이라는 게 직접 꺼내지 않아도 분위기와 공기로도 전해지는 게 당연지사. 당시 디자이너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짐작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디자이너의 얼굴은 항상 구김이 없었다. 뽀얀 얼 굴에 동그란 안경을 얹고, 청바지에 늘 말끔한 셔츠를 입던 디자이너는 긴장이나 불편한 기색 없이 편편한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를 하고 제 자리에 앉아 일을 했다. 정해진 시간에 함께 식사를 하고 업무를 마치면 공손히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정해진 업무를 온전히 마무리하는 게 프리랜서 디자이너의 일이었고, 그녀는 모자람이 없었다.

오히려 늘 불편하고 고생스러운 건 나를 포함한 정규직 직원들이었다. 마감일은 정해져 있는데, 취재하고 써야 할 기사는 늘 벅찼다. 사회생활이랍시고 서로 눈치 보고 비위에 안 맞는 아첨을 하는 것도 필요했다. 속으로 죽어라 싫어하는 회식에 참석해야 했고, 상사에게 웃음을 선사하기 위해 노래방에서 노래를 하고 우스꽝스러운 춤도 춰야 했다. 그런 회식 자리에 선심 쓰듯 프리랜서 디자이너를 초대하는 마음 씀씀이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프리랜서의 생활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던 직장 생활이 수년간 이어졌고, 나는 총 9년간 회사를 다녔다. 몇 번의 이직도 있었다. 마지막 회사를 나올 무렵에는 퇴근길마다 머릿속에 깜지를 쓰듯 같은 말만 반복했다. ‘나는 회사가 안 맞아. 회사생활이 정말 안 맞아. 회사 다 니기 싫다. 회사 안 다니면 안 되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오래전 사무실에서 마주치던 프리랜서 디자이너는 나의 지난한 회사생활과 닮은꼴을 앞서 경 험했을지 모른다. 숨 막히는 경쟁사회, 매일 보는 동료와 상사의 얼굴이 징그럽게 싫어지는 순간, 화장실에 가는 척 회 사 건물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 퇴근해서 돌아온 집에서 나가기 싫어지는 시간을 거쳐 맡은 일만 충실히 하면 그만인 프리랜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러했듯이.


나는 이제야 그 디자이너의 편편한 얼굴을 이해한다. 남들이 뒤에서 뭐라 수군거리든 매일 보는 사람이 아니니 그만이고, 회식에 참석 안 한다고 해서 동료들과의 사이가 멀어질 걱정할 필요 없고, 일을 마치고도 식은땀 흘리며 앉아 있는 충성 야근도 프리랜서에겐 해당사항이 아니다. 근로형태 중 가장 말끔하고도 당당한 나의 프리랜서 생활을 이야기하게 된 이유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서 사표를 내고, 다음 선택이 다시 회사가 되었다면 나는 절대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회사의 다음 선택이 반드시 회사가 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얼굴이 모두 다르게 생겼듯, 사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회사 아닌 다른 길을 찾아도 내 삶은 망하지 않는다.



* 지난 1월 출간한 저의 두 번째 책 <프리랜서지만 잘 먹고 잘 삽니다>의 일부입니다.

책의 내용 중 10개를 골라 조금씩 소개하려 합니다.

이 글은 책을 시작하는 첫 글 <들어가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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