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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Sep 16. 2020

테이블이 필요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면 오로지 테이블

회사원 시절 쓰던 책상의 종류는 정말이지 다양해서 ‘추억의 책상 컬렉션’을 짜면 볼만하겠단 생각이 들 정도다. 허옇고 무뚝뚝한 사무실용 책상이 가장 많았고, 톱밥을 압축한 MDF 위에 필름을 붙여 만든 흔하고 싼 책상도 다수였다. 이런 책상은 오래 쓰다 필름이 들고일어나면 톱밥 부스러기가 조금씩 흘러나왔다. 독서실 책상처럼 위에 책꽂이가 얹어진 것을 쓴 적도 있고, 마지막에 다니던 회사의 대표는 어설프게 외국 회사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조립식 책상 재료를 잔뜩 사 와서 직원들에게 직접 조립을 시켰다. 이사하던 날 늦은 밤까지 맨손으로 책상을 조립하던 그날의 기억은 최악의 경험이었다.


어쨌든 일을 하려면 책상이 필요하다. 요즘 디지털 노마드족이 많다 해도 디지털 기기를 얹어놓고 자판을 송송 두들길 정도의 테이블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서 해고를 당할 때도 ‘책상을 뺀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책상은 일의 기본이자 바탕, 일의 시작, 소속감을 담아놓는 보금자리다.


프리랜서 작가인 나도 당연히 책상이 필요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내게 작업실의 여부를 물었다.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작업실을 구할 여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다시 출퇴근의 압박을 받고 싶지 않았다. 일과 생활공간을 분리하는 건 프로답고 좋은 행동이 분명하지만, 단점 역시 분명하다.


작업실이라는 공간은 부동산이다. 부동산을 얻으려면 매달 월세 혹은 전세로 공간을 빌려야 한다. 부자라면 매매를 했겠지만 나는 태어나 부자였던 적이 단 1초도 없다. 공간을 빌린다면 그곳은 최소한의 관리가 필요하다. 청소와 정리, 적절한 냉난방 등등 집에서 해야 할 일을 작업실에 또 한 번 부려놓는 게 된다.


또 아침에 일어나 작업실로 가려면 얼굴에 선크림이라도 한 번 발라야 하고, 여름과 겨울이면 더위와 추위와 싸울 준비도 해야 한다. 프리랜서면서 하나도 자유롭지 않은 모습이다. 작업실이란 게 그렇다. 물론 누군가와 공동 작업을 하거나 필요한 기기와 자료가 많은 경우라면 당연히 작업실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처럼 혼자 일하는 프리랜서라면 작업실은 잡무를 늘리는 일등공신일 것이다.

다들 내게 질문하고 기대했던 작업실은 없었지만 다행히 내게는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신혼집 거실에 있던 원목 테이블이었다. 우리 부부의 신혼집은 침실 하나에 아주 좁은 부엌, 부엌과 이어진 거실, 베란다, 또 아주 좁은 욕실이 전부인 작은 아파트였다.


얼마나 좁았냐면 침실에는 침대와 화장대를 두니 문을 여닫는 폭의 공간 외에 아무것도 넣을 수 없는 정도였다. 거실의 한쪽 벽면은 붙박이장이었는데 여기에 우리 부부의 옷가지와 이불 등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식사는 주로 넣었다 뺐다 할 수 있는 아일랜드 식탁에서 했다. 앞서 말한 테이블은 거실의 붙박이장 건너편에 있었다.


에어컨이 서 있고 바로 옆에 허리 높이의 원목 책장이 있었다. 둘 다 결혼하면서 정말 좋아하는 책 몇 권만 가져왔는데도 책장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그 옆에 가로 170cm의 고무나무 테이블과 의자 두 개를 뒀다. 남편과 가구점에서 이 테이블을 고를 때는 가끔 노트북을 하거나 오디오를 얹어 놓는 정도의 간단한 용도로 사용하려고 했다. 두 번째 집으로 이사할 때 이 테이블을 식탁으로 쓰자는 계획도 있었다. 원목 상판은 튼튼했고, 길이도 알맞아서 손님이 오더라도 서너 명이 앉아 밥 먹기에 괜찮은 사이즈였다.


우리는 이 테이블을 거실 한편에 두고, 책장이 도저히 안 되겠다며 토해 놓은 책 몇 권과 블루투스 오디오, 작은 노트북과 조화를 꽂은 화병 하나를 얹어놓았다. 그 테이블은 그 정도의 일만 해도 충분했다. 한가롭게 우리 집에서 몇 가지 물건을 얹은 채 다음 집에 서 식탁으로 승진할 날을 꿈꾸던 테이블은 어느 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둔 나 때문에 막중한 임무를 받게 되었다. 하루아침에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도구이자 일터가 된 것이다.


일단 일을 시작하려니 잡스러운 것들을 다 치워야 했다. 블루투스 오디오는 책장 위 좁은 틈에 아슬아슬하게 놓였고, 화병은 모서리에 간신히 살아남았다. 노트북은 중앙에 놓이고, 업무에 필요한 노트와 다이어리, 필기구, 자료로 쓸 도서 몇 권이 열을 맞춰 자리를 잡았다. 의자 두 개 중 하나는 걸리적거려서 아일랜드 식탁 앞에 갖다 놓았다. 한가롭게 2년 뒤만 기약하던 테이블은 예정보다 빨리 승진했다. 대신 승진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낮에 8시간 가까이 테이블 위에서 지내다 보니 이런저런 흠집이 많이 생겼다. 테이블에 칼이나 가위를 갖다 댄 적이 없음에도 무엇에 긁힌 건지, 테이블 위에 무수히 많은 흠집이 남았다.


일하다 피곤해 엎드려 잘 때는 테이블의 상판이 내 뺨을 시원하게 받쳐줬다. 많이 바쁜 날에는 점심식사를 거르고 빵과 커피로 때우곤 하는데, 업무용 책상과 티 테이블 역할까지 감당하느라 아주 열심이었다. 책상을 새로 구입하지 않아도 충분한 테이블이 있는 건 다행이었지만, 거실은 업무용 공간으로 후한 점수를 받긴 어려웠다. 일하다 오른쪽을 보면 볕이 잘 들어오는 베란다 덕에 허상에 빠지거나 멍해지기 일쑤였고, 왼쪽을 보면 바로 주방이 있어 잡스러운 주방 일이 눈에 들어왔다. 일하다가 일어나 주방을 정리하거나 빨래를 갠 적도 많았다. 책상에서 완전히 뒤를 돌면 욕실이 보였다. 그 거리가 멀지 않아서 가끔 화장실에서 일하는 기분도 들었다.


그래서 두 번째 집으로 이사를 한다면 방 한 개는 큰 맘먹고 내게 떼어주리라 다짐했다. 아주 작은 방이어도 괜찮다. 그곳에는 일하기에 딱 좋은 책상과 컴퓨터를 설치하고, 좋아하는 그림을 걸고, 책상 위는 말끔하게 정리하리라. 뒤편의 책장에는 내 소지품과 필요한 것을 정리하고 커튼도 내 취향대로 걸어놓고 싶었다.


그 다짐은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오며 모두 이루어졌다. 길쭉한 모양의 작은 방을 서재로 만든 것이다. 하얀 벽면에 좋아하는 에곤 실레의 그림을 걸고 은은한 무늬의 시계를 하나 사서 걸었다. 달력은 작은 것으로 한 장 걸어두었고, 신혼집 거실에 있던 책장도 서재로 들였다. 다만 다짐과 달리 신혼집의 테이블은 본래 목표였던 식탁이 될 수 없었다. 내가 쓰는 동안 생긴 많은 흠집, 그리고 업무용으로 쓴 시간 때문인지 그 테이블에 밥을 올려놓고 먹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정이 들었다는 단순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나무였던 것이 무생물인 테이블이 되었건만, 그 테이블은 내게 익숙한 동료였다. 피곤한 나머지 잠시 엎드려 잘 때면 다독다독 위로를 전하던 매끈한 상판, 갑작스레 일이 몰리던 날 쌓여가는 자료와 도서를 거뜬히 들고 있던 몸이며, 한가로운 날은 뜨거운 커피가 담긴 머그잔도 고고히 감당하던 테이블은 이제 식탁으로 영영 돌아갈 수 없는 소중한 동료가 되어 있었다. 결국 테이블은 두 번째 집에서 주방이 아닌 서재로 이사를 왔다. 식탁은 새로 4인용을 샀다.


프리랜서가 되기 위해 준비할 사항 중 우선해야 할 것은 작업실보다 테이블일 것이다. 그저 내 한 몸 받쳐주는 테이블 하나. 딱 그것 하나부터 장만해야 한다. 그 외에는 있으면 좋을 것들이지만,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면 오로지 테이블이다. 테이블 다음으로 소중한 것은 서재다. 일할 공간이 생기면 일의 효율에 굉장한 영향을 준다. 과거에 6~8시간 걸리던 일이 서재에서는 4시간이면 끝난다. 아마 왼편의 주방도 오른편의 베란다도, 뒤편의 화장실도 보이지 않아서일 거다.


테이블 주위로 나와 컴퓨터, 일감이 실랑이를 하며 일에 매 진할 수 있는 서재라는 공간은 굉장한 집중력을 선물한다. 말끔히 정돈된 서재에서 평소보다 빠른 손가락으로 키보드 위에서 날아다니듯 신나게 글을 쓰다 거실로 나오면 또 제 몫을 하는 소파가 나를 안아준다. 소파에 기대 문 열린 서재를 바라보면 테이블도 한숨 돌리며 쉬는 모습이 보인다. 나의 소중한 프리랜서 메이트가 쉬는 모습이다.


* 이 글은 지난 1월 출간한 <프리랜서지만 잘 먹고 잘 삽니다>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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