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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Sep 18. 2020

그래서 얼마면 돼?

프리랜서 작가의 원고료

하나를 포기하면 하나가 온다더니. 오늘 내게 일어난 일이다. 기쁜 마음으로 하나를 얻고, 아쉬운 마음으로 하나를 포기했다. 내가 포기할 수 있는 작은 것은 무엇일까. 음식에 넣는 소금의 양, 더 마시고 싶지만 내일의 컨디션을 위해 참는 맥주, 경품 추첨에서 빠르게 손을 들고 쟁취하는 특별한 선물. 오늘은 그런 종류와는 다른 포기라서 조금 아쉽다.


나는 종종 구직사이트에 올라온 공고에 지원하며 일감을 구한다. 지원 시 제출한 서류와 포트폴리오를 검토받은 후 바로 일을 진행하거나 미팅이나 면접 후 진행하기도 한다. 가장 좋은 경우는 예전에 함께 일한 곳에서 다시 일해보자며 새 프로젝트를 제안하는 때다. 이 경우에는 갑과 을의 관계이긴 하나 서로에 대한 신뢰가 탄탄한 상태이고, 업무방식도 익숙하기 때문에 일을 하는 데 군더더기가 없다.


지금은 작년에 참여했던 프로젝트를 올해 새로 시작하면서 다시 일해보자고 연락 온 곳과 고료가 적긴 하지만 업무 방식이 자율적이고 내 글에 만족도가 높은 곳까지 두 업체에서 의뢰받아 글을 쓰고 있다. 마감일이 정해져 있지만 늘 마감일보다 일찍 원고를 보내고, 가능한 업체에서 교정과 손질을 볼 필요가 없도록 꼼꼼히 글을 써 보내는 것. 그게 내가 추구하는 업무방식이다.


작년에는 5개 업체와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지금은 두 곳이라 살짝 한가하다. 4개까지 하면 생활이 너무 팍팍할 듯하니 3개 업체와 일할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며칠 전 다시 구직사이트에 들어갔다. 접속하자마자 눈에 띄는 이름이 있었다. 도서관에서 매달 지켜보던 어느 잡지의 이름이었다.


평소 그 잡지를 읽으며 ‘나도 이런 글을 써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새로운 소식을 급히 전하는 기사가 아니라 이미 있는 무언가 혹은 새로 나온 무언가에 대해 깊이 있게 쓰는 글들이었다. 기사라고 꼭 빠를 필요 있는가. 모바일 미디어와 SNS가 이미 많은 소식을 빠르게 전하고 있는데 나까지 속보를 보태고 싶지 않았다. 그 잡지의 글은 내가 추구하는 ‘깊고 진득한 글’이었다. 업체 정보를 보니 작은 규모의 회사에서 발행하는 매거진인 듯했다. 회사 규모가 작은들 어떠한가. 존중하며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회사 규모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지원 버튼을 눌렀다.


또 하나는 규모가 큰 업체였다. 그곳에서 운영하는 사업에 참여한 이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는 일이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것을 글로 옮기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공고에 기재된 고료도 적당했다. 망설임 없이 포트폴리오를 제출했다. 두 업체에 지원을 하고 한 곳이라도 연락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연락이 온 곳은 전자의 잡지사였다. 미팅을 하자는 전화를 받고 며칠 후 사무실을 찾았다. 마침 약한 비가 내리다 그쳐서 공기가 선선했고, 기분이 좋았다. 내가 쓴 글이 담긴 고고한 자태의 잡지를 상상하며 길을 걸었다.

‘손에 쏙 들어오는 그 잡지의 두께감에 내 글이 속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그곳의 사무실도 고고한 자태를 하고 있을까.’

‘깊이 있는 글을 쓰는 그들은 나처럼 시력이 안 좋겠지. 어떤 안경들을 쓰고 있으려나.’


하지만 담배 냄새가 짙게 배인 회의실에서 미팅을 시작한 이후 나는 조금씩 속상해지기 시작했다. 고고한 사무실 자태는 둘째 치더라도 내 경력에 맞는 고료를 제안해주길 바랐다. 평소 내가 받는 고료의 반의반도 되지 않는 데다 취재비 지원조차 없다는 조건을 들으며 차라리 밖에 비가 철철 내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런 말까지 들었다.

“경력이 엄청 화려하시네. 해본 게 많으시네요.”

그 말에 대한 대답은 속으로만 했다.

‘그러니까요. 해본 프로젝트가 그렇게 많은데 이런 고료를 제시하시다니요.’

대답 대신 헤헤 웃으며 참여했던 프로젝트를 설명했다. 슬쩍 내 의사도 전해봤다.

“제시하신 고료가 제가 받던 고료보다 많이 적은데요, 경력에 따른 고료 조정은 없나요?”

“네, 없습니다.”

상대는 딱 잘라 말했다. 일단 서로에게 긍정적인 의사를 표시하며 미팅을 마쳤다.


그토록 마음에 드는 잡지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적은 고료 때문에 돌아와서도 고민을 멈출 수 없었다. 아무리 매체가 마음에 든다 한들 내 글에 대한 자부심을 헐값에 넘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작가인데, 열심히 생각하고 마음을 눌러 담아 쓴 글의 대가를 푼돈으로 받고 싶지 않았다. 또 한 번 낮추기 시작하면 끝없이 내 몸값이 낮아질 것 같아 두려웠다. 한편으로는 요즘 이 업계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 내가 무슨 배짱을 부리는가 싶어 스스로가 밉기도 했다.


사실 이렇게 낮은 고료에 상처 받은 일이 처음도 아니었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박한 고료를 제시하거나, 애초에 논의한 고료에 몇 가지 업무를 덤으로 넘기는 곳도 많았다. 프리랜서를 구한다기에 갔더니 주4일 출근해 나이 든 직원들 문서작업을 해달라는 엄한 조건을 들이대는 곳도 있었다. 언젠가 미팅을 제안한 신문사에서는 이런 질문도 했다.

“프리랜서 작가면 돈벌이가 시원치 않죠? 먹고살기 힘들겠네요.”


이렇게 무례할 수가. 내가 돈벌이가 시원치 않다고 절절매며 일거리를 조를 거라 예상한 걸까. 몹시 불쾌해지는 바람에 나는 대답도 제대로 안 하고 얼른 자리를 파하고 돌아왔다.


이런 종류의 회사들과 담당자들을 만나면 옛 드라마의 유행어처럼 “얼마면 돼?”를 거들먹거리는 모습이 비쳐 보인다. 나야말로 얼마면 되냐고 되레 묻고 싶다. 대체 얼마나 고료 후려치기를 해야 당신들 속이 편하겠냐고.

그리고 오늘 비 그친 오후에 만났던 잡지사에서 함께 일하자고 연락이 왔다. 결국 거절하고 말았다. 담당자가 이유를 물었는데 고료 외에 신경 쓰였던 점 하나를 이야기하고 통화를 마무리했다. 차마 고료에 서운하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또한 업체들이 채용공고에 처음부터 고료를 공개해놨더라면 이런 불편한 만남도 없었을 테다. 고료를 왜 꽁꽁 숨 겨놨다가 미팅 자리에서 잔뜩 간 보고 난 후에야 공개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고료나 급여가 엄청난 회사 기밀도 아닌데, 구직자를 위한 배려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거절 의사를 밝히고 쌉싸름한 마음이 들던 중에 전화 한 통을 더 받았다. 지원했던 두 업체 중 나머지 한 곳이었다. 함께 일해보자는 이야기였다. 이미 공개해놨던 고료가 적당하기도 했고 구태여 조건 숨겨가며 사람 구하지 않는 자세도 썩 마음에 들었다. 고민할 필요가 뭐 있겠나. 나를 선정해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향후 일정을 논의했다.


프리랜서는 욕심을 내면 낼수록 일을 많이 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 일하는 동안 성실하게 클라이언트를 대하고 내 일처럼 애착을 갖고 임하면 그 관계가 오래도록 이어진다. 나는 계약이 끝나고도 함께 일하던 사람들과 가끔 연락을 하고, 밥도 먹고, 차도 마신다. 그들의 공통점은 고료 몇 푼에 나를 흥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어쩌다 만난 회사에서 말도 안 되는 고료를 제시해 서운해도, 엄한 조건으로 흠집을 내도 포기하지 않는다. 여전히 좋은 사람들과 기회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 다소 불안정한 프리랜서 생활일지 모르지만, 나는 꽤나 시원하고 즐겁게 일하는 프리랜서라는 게 불변의 사실이다.


* 이 글은 지난 1월 출간한 <프리랜서지만 잘 먹고 잘 삽니다>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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