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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Sep 25. 2020

두 번의 식사대접

한술 밥에 감동이 최고의 반찬

자주는 아니더라도 식사대접을 받을 일이 종종 생긴다. 소속이 없는 내가 대접받는 경우는 일정상 긴 시간 동행하는 담당자, 프리랜서지만 식구로 생각하는 이들과의 회식, 그리고 취재원의 호의로 이루어지는 식사자리다.


가장 편한 것은 동행하는 담당자와의 식사다. 업무상 용건이 분명한 사이에서 거치는 실용적인 식사자리이기 때문이다. 그저 주어진 가격대 내에서 적당한 메뉴를 고르면 된다. 서로 격식 차릴 필요가 없는 사이라 그저 소소한 잡담과 업무상 필요한 정보를 교류하며 식사하면 된다.


보통 기관이나 기업에 따라 식비가 정해져 있는데, 그 액수는 제각각이다. 한 번은 식비로 주어진 금액이 좀 많은 기업 담당자와의 식사자리가 있었는데, 잔액을 남겨 가면 오히려 의심을 받을 수 있다며 두 명의 식사에 3인분을 시킨 적도 있었다. 비록 음식은 많이 남았지만, 내가 그 입장이었어도 그랬으리라 생각한다. 담당자가 내게 “많이 드세요.”라고 권했는데, 정말 많이 먹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쿨쿨 잠이 들 정도로 말이다. 어쩌다 꼭 참석해야 하는 회식자리는 식사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좀 더 길게 대화하고, 때론 술잔이 오가기 때문에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


취재원과의 식사자리는 경우에 따라 매우 재밌거나 불편하다. 취재원과 이런저런 이야기가 편한 또래면 괜찮은데, 연배가 높은 취재원과의 자리에서는 예의나 격식은 물론이거니와 어색하지 않으면서도 엇나가지 않을 정도의 이야깃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두둑한 연륜에서 나오는 경험담이나 우화를 들을 때면 예상치 못한 소득으로 오래도록 마음이 든든해지기도 한다. 대신 취재원이 술을 강요하거나 자신이 살아온 역사를 구구절절 읊는 자리는 언제든 불편하다.


그래도 내겐 좋은 식사자리가 훨씬 많았다. 불편한 식사 자리는 10%도 되지 않는다. 담당자든, 취재원이든, 고용자든 다 사람 아니겠는가. 사람과 사람이 상을 하나 펴두고 밥을 먹는 자리는 여간해서는 나빠지기 어렵다. 서로 관찰하고 흠집 내려는 자리가 아닌 이상, 오늘 하루를 지탱할 연료를 채우는 식사자리는 업무시간 중 가장 인간미와 본능이 넘치는 자리가 아닐는지.

여러 식사자리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좋았던 건 연배가 꽤 높은 작가님을 인터뷰하던 날이었다. 동양화를 그리는 작가셨는데, 평생 전업주부로 살다가 남편이 병환으로 세상을 떠난 후 원하는 삶을 찾아가고자 그림을 시작하신 분이었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 처음 붓을 잡으셨고 거듭 학문의 길을 밟으며 그림 공부를 쉬지 않으셨다. 칠순이 넘어서는 큰 대회에서 입상하셨고 그 덕에 개인전을 여러 번 열 수 있었다. 그분의 그림은 오랜 세월을 산 화가의 담백함이 깃든 풍경화인데, 자세히 살펴보면 화통을 붙잡은 진득한 애정과 젊은 여인의 열정이 함께 엿보이는 작품이었다.


그날의 인터뷰는 작가의 자택이자 작업실을 겸한 곳이었다. 서울에 위치한 아파트였다. 오랫동안 그 동네에 살았던 작가님은 남편이 작고한 후, 같은 동네에서 조금 작은 아파트로 옮겨 본인의 침실과 작업실을 만들고 간소한 살림을 꾸렸다. 그곳에서 문을 열고 맞이해주셨던 작가님의 모습은 흡사 나의 할머니였고, 먼 훗날 손에서 열정을 놓지 않고픈 나의 미래상이었다.


우리 할머니처럼 뽀글이 파마에 안경을 쓴, 편안한 차림의 작가님은 다과를 차려주시고는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저는 큰 작가도 아니고, 화백 소리를 들을 만큼 대단한 화가도 아닌데 이렇게 인터뷰를 와주신다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손사래를 치며 내가 인터뷰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나는 그분이 뒤늦게 시작한 작가 생활을 충분히 자랑스러워하시길 바랐다.

“나는 별로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우리 자손들은 나를 자랑스러워해요. 우리 손자는 언제부턴가 나를 ‘임 화백님’이 라고 부르더라고요. 우리 할머니 작품이 제일 멋지다는 말도 하고. 정말 부끄럽지만, 자손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 제가 복 받은 사람이란 뜻이겠죠.”

말씀하시는 굽이굽이 수줍음이 가득했다.


작가님의 작업실은 아주 작은 방이었는데, 작업 중인 화폭이 펼쳐져 있었고 재료들이 정돈되어 있었다. 작업방식을 설명해주셨고, 작업실에서 간단한 촬영과 함께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오늘의 만남이 반가웠다고 인사를 하며 카메라를 가방에 담고 있는데 먼저 식사를 제안하셨다.

“별거는 아니고 제가 평소 먹던 반찬에 식사하고 가시면 어때요?”

자택으로 인터뷰까지 왔는데 혹여나 폐가 될까 싶어 처 음엔 거절했다.

“아니에요. 작가님께 좋은 얘기 많이 들었는데 식사까지 차려주시면 실례일 것 같아요.”

“실례라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저도 어차피 식사해야 하는데 같이 들어요.”


어차피 내가 돌아가면 혼자 식사를 하실 터였다. 제안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주방 쪽으로 갔다. 작가님은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려 된장찌개를 끓였고,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꺼내 접시에 옮겨 담으셨다. 몇 종류의 나물과 장아찌가 등장했고, 되직하게 끓인 된장찌개와 잡곡밥이 따끈하게 차려졌다. 소박하면서 정성이 가득 담긴 채식 식단이었다.

평소 식사대접 자리들이 짜고 기름진 육류 중심의 식단이었다면, 작가님이 직접 만든 반찬으로 차려주신 식탁은 수수하면서도 놀랄 만큼 감동적인 밥상이었다. 감탄이 절로 터졌다.

“와, 정말 너무 좋아요. 저 나물에 밥 먹는 거 되게 좋아하거든요.”

“막상 같이 먹자고 했지만 차린 게 없어요.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붙잡았는데 반찬이 별로 없어서 좀 미안하 네요.”

“아니에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반찬들이에요. 저희 할머니가 차려주시면 이런 밥상일 거예요.”


당시에는 내 할머니가 돌아가시기도 훨씬 전인데도 왜인지 눈물이 났다. 짭조름한 찌개 한술을 뜨는데 코가 시큰했고, 삼삼하게 만들어진 반찬들이 자꾸 심금을 울렸다. 혹시나 어색한 분위기가 될까 봐 눈물을 꾹 참고 먹었던 그 밥상은 지금껏 어느 자리에서 받은 식사대접보다 훌륭했다. 식사를 마치고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로 옮기는 것만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작가님은 극구 말렸다. 밥도 잘 얻어먹었는데 내가 돌아간 뒤 설거지하시는 모습이 떠올라 조금이나마 일손을 돕고 싶었지만, 안 된다고 등을 떠미셨다.


결국 가방을 메고 돌아가기 위해 신발을 신고 있는데 내 어깨에 매달린 백팩이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겨울엔 이런 거 자주 먹어야 해요. 사무실에 돌아가면 일 하면서 까먹어요.”

웬걸, 그 잠깐 새에 냉장고에서 꺼내온 자몽과 오렌지를 내 가방에 담고 계셨다. 내가 거절이라도 할까봐 가방에 얼른 넣어주시고는 현관 밖까지 마중을 나오셨다.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역에 가방을 메고 서 있는데, 평소 짐짝처럼 느껴지던 내 가방이 세상 더없이 소중히 느껴지는 건 뭘까.


인터뷰를 위해 방문한 이날, 작가님의 집에서 나는 어디에 서도 구하기 어려운 소중한 감정들을 받아왔다. 그것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베푸는 호의, 한참 어린 상대에게도 빼놓지 않은 예의, 자신의 이야기와 가진 것을 기꺼이 나눠 갖는 선량함이었다.


기사가 책자에 실렸을 무렵, 작가님으로부터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한 번 더 식사를 하자는 용건이었다. 약속한 자리는 인근 한정식 집이었다. 지난번보다 조금 더 편안한 표정으로 만난 작가님은 자리를 마련한 속내를 꺼내놓으셨다.

“지난번에 우리 집에서 된장찌개 끓여서 기자님 대접했다고 친구들에게 아주 혼이 났지 뭐예요. 식사대접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혹시 불쾌했다면 미안해요.”

“아니요, 전혀요. 저는 직접 차려주신 식사 정말 좋았는 걸요. 불쾌할 리가 있나요.”


친구들에게 핀잔을 듣고 여러 날 마음이 안 좋았다는 70대 작가님의 소녀감성을 마주하니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고급스러운 식당에서 한 번 더 대접해주신 식사 역시 따뜻했다. 지난번 밥상도 대접받았으니 내가 계산하고 싶었지만, 작가님은 거기까지 생각하신 건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계산을 마치고는 내 손을 덥석 잡고 식당 밖으로 나오셨다.


이런 사례는 드물지만 나는 두 번이나 작가님과 식사를 나누면서 ‘이분과는 나이와 상관없이 지란지교가 가능하겠구나.’ 하고 짐작했다. 이후 작가님의 개인전이 열렸다고 해서 나는 작은 꽃다발을 들고 찾아뵈었고, 종종 메시지로 안부를 묻고는 했다. 세월이 많이 흐르면 연락의 횟수가 잦아드는 게 당연하지만, 나와 작가님은 불쑥 연락을 드리거나 불쑥 연락을 받아도 어색함 한 줄 없이 반가울 사이임을 확신한다. 어쩌면 낯선 이였을 내게 주신 감사한 호의, 그 따뜻했던 두 번의 식사대접은 수년이 지났어도 손꼽히는 자양분으로 남아 있다.



* 이 글은 지난 1월 출간한 <프리랜서지만 잘 먹고 잘 삽니다>의 일부입니다.

* 책이 나온 뒤 글에서처럼 불쑥 작가님께 연락을 드렸는데 연락을 받지 않으셨어요. 이후 전화도 안 받으시고, 메시지에 답도 없으셔서 지금까지 저는 불안한 마음이 듭니다. 연세가 많으신 분이라 좀 더 자주 연락드리지 못한 제가 미울 정도로요. 너무 늦지 않게 연락이 닿아 따뜻한 표정을 한 번 더 뵙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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