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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Oct 06. 2020

내 삶의 성적표를 받았다

나오며.

얼마 전 메신저로 사진 한 장을 전송받았다. 함께 취재를 나갔던 담당자가 촬영을 맡고 있었는데, 카메라에 우연히 내 사진 한 장이 찍힌 모양이었다.

“기자님, 잘못 찍힌 사진이긴 한데 엄청 해맑게 웃고 계 시네요!”


사진 속의 나는 뜨겁게 햇볕이 내리쬐는 마당에서 촬영과 인터뷰가 끝나자 소품을 들고 차로 돌아가는 중이었는데, 담당자 말대로 그지없이 해맑은 얼굴이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도록 눈매의 곡선이 한껏 휘어졌고, 치아가 가득 드러나도록 웃는 바람에 안 그래도 통통한 얼굴이 더 동그랗게 보였다.


평소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있을 때 화났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웃는 상’이 아니기에 사진 속 넘치게 웃고 있는 나는 마치 다른 사람처럼, 낯익은 지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회사에 다닐 때도 종종 사진에 찍히곤 했다. 전 직원이 열을 맞춰 찍는 단체사진, 회사의 외부행사에 동원되어 하루 종일 서서 안내를 맡았을 때 찍힌 사진, 워크숍에서 나도 모르게 찍힌 사진 속 못생긴 얼굴.


그중에서도 가장 싫었던 사진은 워크숍에서 억지로 의자 위에 올라가 춤을 추다 찍힌 것이었다. 내가 3년 넘게 몸담았던 어느 회사는 매년 워크숍을 갔는데, 성별과 직급을 두루 섞어 7~8명씩 조를 짜고 반드시 사원, 주임, 대리급의 여성 직원을 조장으로 정했다.


직급이 낮은 여성 직원을 조장으로 정하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오락시간에 조장들을 의자 위나 테이블 앞에 세워 춤을 시키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춤을 출 때는 최대한 흉하고 웃기게, 사람들의 웃음과 환호를 한껏 끌어내야 춤을 끝낼 수 있었다. 내 뜻대로 춤을 끝내거나 안 하겠다고 거부할 수 없었다. 내가 의자 위에서 억지로 춤을 출 때 사람들은 떠들썩하게 웃었고, 나는 속으로 울었다.

어처구니없는 조직문화의 기업들을 9년간 거치며, 사진 속 나는 못생기고 불편했다. 그 불편한 얼굴은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낸 페르소나일 수도 있다. 나는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고, 나를 곤경에 빠뜨리지 말아 달라고, 불행한 얼굴로 사진을 찍고 싶지 않다며 어두운 낯빛의 가면을 쓴다.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강아지도 지독한 송곳니가 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 되면 낮은 목소리로 그르렁댄다. 그 시절 나의 페르소나는 하룻강아지의 작은 송곳니와 뭐가 다를까.


그렇게 지난했던 회사원 시절을 거쳐 프리랜서로 산 지 올해로 5년째. 사진 속 나는 불행하지 않고 그르렁대지도 않는다. 과거에 비해 건강해진 영향인지 조금 통통해진 얼굴로 근심 없이 활짝 웃는다. 맞지 않는 갑옷을 전쟁터에 버리고 집에 돌아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것처럼 너그러운 얼굴이다. 우연히 찍힌 사진은 충분히 좋은 삶을 살고 있다며 현재를 확인해주는 성적표와 같았다.


9년간 폭염이 계속되었고 드디어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시절이 왔다고 느껴진다. 이제는 내 뜻대로 살 수 있고 조직의 톱니바퀴로 억지웃음 짓지 않는다. 프리랜서로 살며 아프면 마음껏 아프고 슬플 땐 마음껏 슬퍼하고 기쁨을 실컷 내색할 수 있어서 지금의 나는 확실히 행복하다.



* 이 글은 지난 1월 출간한 <프리랜서지만 잘 먹고 잘 삽니다>의 일부이며, 책을 마치는 에필로그입니다.


안녕하세요. 도란 작가입니다.

지금까지 <프리랜서지만 잘 먹고 잘 삽니다> 속 10편의 글을 살짝 보여드렸는데요.

이 책이 출간되면서 저는 많은 기회가 생겼고, 많은 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프리랜서지만 잘 먹고 잘 삽니다>는 제가 프리랜서로서 진정 잘 살 수 있도록 힘껏 제 등을 밀어준 고마운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통해 모두 회사를 그만두고 프리랜서가 돼야 한다고 말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자유롭고 편안할 거란 기대감에 섣부른 판단을 하지 말라고 만류하는 의미가 더 큽니다.
그럼에도 한 번씩 회사생활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이렇게 사는 게 정말 좋은 건지 밤잠 이루지 못하고, 다양한 삶의 방식을 알고 싶지만 막막한 분들에게 '이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가지 하나를 늘려줄 수는 있겠지요.
"프리랜서의 현실은 이러한데, 정말 괜찮겠어? 그래도 좋다면 환영해. 좋은 점도 꽤 많거든!" 이런 느낌이랄까요?
모쪼록 책 표지처럼 책상 앞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이 길어지는 분들에게 여리게나마 힘이 되고 싶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런치에 소개하지 못한 글들은 종이책과 e북으로 만나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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