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리밥 Oct 05. 2020

‘엄마’를 배운다

그들의 모성이 가르쳐준 것

나와 남편은 오랜 고심 끝에 자녀를 낳지 않기로 결정한 딩크(DINK) 부부다. 자녀의 유무가 행복의 유무를 결정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에 지금껏 잘 지내왔고 앞으로도 잘 지낼 거라는 예감이 든다. 다만 작가로 살아가는 나는 이따금씩 아이를 키우는 또래 여성에 대한 공감대가 부족하다고 느껴왔다.


‘아이를 키우는 기쁨’이 세상에서 제일이라고, 여자라면 이걸 겪어봐야 한다고 주변에서 숱하게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세상에 많은 기쁨 중 그 기쁨 하나가 제일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또래의 자녀를 낳아 가까이서 키우며 친하게 지내고 싶어하는 가족과 친구를 대할 때도 자녀 중심의 인간관계가 왜 필요한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또 아이를 키우는 노고는 충분히 공감하지만 크게 아는 바가 없으니 나는 그들을 위로하더라도 반쪽짜리였다. 주변으로부터 아이를 키우는 기쁨과 어려움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왔어도 무덤덤했던 내가 ‘엄마’라는 존재의 가치, 아이를 키우는 기쁨을 제대로 실감한 건 의외로 처음 보는 타인들을 만나서였다.


그 만남은 장애인 가정을 인터뷰하고 콘텐츠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통해 이루어졌다. 차를 타고 한참 달려야 하는 먼 지방으로 취재를 갔다. 약속장소는 인터뷰이가 치료를 받는 병원 응접실이었다. 잠시 앉아서 땀을 식히고 있는데 휠체어를 타고 인터뷰이가 들어왔다. 21살 앳된 얼굴의 H양이었다.

“안녕하세요? 많이 기다리셨나요?”


조금 느리지만 또박또박한 말투였다. 뇌병변장애를 앓고 있다고 들었는데, 예상보다 비장애인과 다름없을 정도로 말솜씨가 좋았다. 만약 휠체어가 테이블에 가려져 있었다면 장애인인 줄 아무도 눈치 못 챘을 거라 짐작했다.


잠시 후 H의 어머니도 도착했다. 그런데 H의 어머니는 예정에 없던 사람을 데려왔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들어온 사람은 1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장애여성이었다.

“H가 취직을 했으니 저도 자유롭게 취직을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H를 키우며 느낀 점, 익숙한 점이 있으니 이왕이면 장애자녀들을 돕는 일을 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복지관에 장애인 돌보미 신청을 해서 활동보조 일을 하고 있어요.”


H의 어머니가 장애자녀를 키우며 느끼고 익숙해진 게 그저 편안하고 좋기만 한 일이었을까. 걷지 못하는 H를 업고 병원과 학교에 데리고 다니던 어머니였다. 장애가 있는 딸일지언정 사회에서 제 몫을 해내도록 키우기 위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자신보다 훌쩍 커버린 딸을 업고 다닌 어머니였다.


뇌병변장애에도 불구하고 또박또박했던 H의 발음은 그녀의 어머니와 수없이 연습하고 배워 몸에 새긴 언어였다. 딸이 성인이 될 때까지의 고단함을 온몸으로 껴안았던 H의 어머니는 딸이 사회생활을 시작하자 재취직을 시도했다. 그 재취직 역시 홀로 일상이 어려운 장애인의 활동보조였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H의 어머니는 한 손으로는 자신의 딸인 H의 손을, 다른 한 손은 활동을 도와주는 장애여성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아프게 태어난 자신의 딸을 고이 키워냈으니 이제는 몸 편하고 넉넉히 벌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할 수도 있으련만. 다시금 타인의 고단함을 껴안고 평지가 아닌 고갯길을 건너려는 H의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마음이 뜨거운 ‘엄마’였다.

다시 몇 개월이 지나 하반기 취재를 시작했다. 장애아동의 가정을 방문한 날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약속 장소 주변을 서성이고 있는데 저 멀리서 작은 오토바이가 보였다. 앞좌석에는 엄마로 보이는 중년 여성, 뒷좌석에는 엄마의 허리를 꼭 끌어안고 앉은 열 살 남짓의 J가 보였다.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도 해사하게 웃으며 달려오는 모자의 주변만은 어쩐지 봄기운이 감겨 있었다.


오토바이에서 내린 모자와 인사를 나누고 골목 안쪽 J의 집으로 들어갔다. 조금 오래된 아담한 단독주택이었는데, 마당 한쪽에는 집채만한 개가 있었다. 개는 낯선 사람을 보자마자 우렁차게 짖어댔다. 큰 개를 극도로 무서워하는 나는 대문 안쪽에 발도 못 디디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 J는 개를 다독였다. 본인보다 몸집이 큰 개를 차분하게 다독이며 내게 얼른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J에게는 나 역시 낯설고 처음 본 어른일 뿐인데 나름의 방법으로 손 님을 반겨주는 게 여간 기특한 게 아니었다.

‘이렇게 밝고 또랑또랑한데,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장애가 있다고?’


혹여나 개가 또 짖을까 봐 서둘러 집 안으로 쏙 들어갔다. 다섯 식구가 살기에 여유로운 집은 아니었지만 알뜰하게 살림을 꾸려가는 가정임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곳곳에 붙어 있는 가족사진을 둘러보며 가족들 간의 사랑이 온 집안에 꽉 차고도 넘친다는 점도 짐작할 수 있었다.


J의 어머니와 거실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겉으로 보기에 활발하고 웃음이 많은 J는 지적능력의 성장이 조금 더딘 아이였다. 그런데 J의 어머니는 의외의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봉사활동을 다니던 입양기관에서 J를 처음 만나 위탁 양육을 시작했어요. 태어날 때부터 장애가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요. 그런데 1년 가까이 위탁 양육을 하고 나니 언제부턴가 J가 당연한 우리 가족이 되었더라고요. 이렇게 예쁜 막내를 어떻게 시설로 돌려보낼 수 있겠어요. 위탁 양육 기간이 끝나고 정식으로 입양했죠.”


J를 1년간 위탁 양육하기 전부터 이들 부부에게는 이미 훌쩍 큰 자녀들이 있었다. 그런데 자녀들과 함께 J를 키우는 동안 너무나 자연스럽게 J는 이 가정의 막내아들이 되었다. J의 어머니에게서 듣기로는 어린 J를 입양해 키우며 온족은 웃는 날이 많아졌다며, 우리 집에 찾아온 복덩이라고 했다.


장애가 있는 아이를 입양할 때는 비장애인 아이를 입양할 때보다 고려할 점이 더 많다. 키우는 비용은 물론 돌봄 시간이나 익혀야 할 지식이 상당하다. 어떤 어려움이 동반되는지 분명 알고도 아이를 품을 때, 그 사랑에는 무엇으로도 정확히 표현할 수 없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나는 J의 어머니가 몹시 큰사람으로 느껴졌고, 장애를 가진 J가 그토록 밝고 사랑스러운 이유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무렵 J의 어머니는 이런 말을 했다.

“장애자녀를 둔 부모는 순간순간이 치열해요. 당연히 건강한 아이에 비해 늘 긴장되고 손이 많이 가죠. 하지만 아이가 잘 자라는 모습에 힘든 건 금방 잊어요. 그렇게 우리 가족 모두가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가는 거죠.”

눈가와 입매에 웃음이 가득한 J의 어머니에게 입양 사실과 J의 장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아이의 존재에게서 비롯된 행복의 민낯을 힘껏 받아들이는 사람이었다. 입양아를 표현할 때 ‘가슴으로 낳은 자식’이란 말을 자주 하는데, 내가 본 J의 어머니는 가슴으로 낳기 전 이미 J를 운명으로 낳은 ‘엄마’였다.


‘아이를 키우는 기쁨’이 말하는 추상적인 행복은 여전히 실감나지 않는다. 하지만 H의 어머니와 J의 어머니를 만난 이후 엄마라는 존재가 숭고한 이유를 또렷하게 느꼈다. 자식을 향해 무한대로 힘을 낼 수 있는 존재이자 손에 잡히지 않는 사랑을 잡힐 것처럼 확실하게 뿜어내는 존재로서의 엄마. 나는 이들로부터 ‘엄마’를 배웠다.


* 이 글은 지난 1월 출간한 <프리랜서지만 잘 먹고 잘 삽니다>의 일부입니다.

이전 08화 두 번의 식사대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