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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Sep 22. 2020

작업복은 필수

여정을 함께한 만큼 낡아가는 것들

미팅 시간 10분 전, 새 프로젝트 개시 전 클라이언트와의 미팅을 위해 서울 한복판의 사무실을 찾았다. 건물 로비에서 이번 프로젝트를 소개해준 에이전시 직원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회의실로 걸어가며 클라이언트 기업 소속 직원들을 여럿 마주친다. 비교적 편안한 업무 분위기인지 청바지에 캐주얼한 셔츠, 후드 집업 등을 걸친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처럼 경직된 차림새로 온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평소답지 않게 이날은 구두를 신었다. 1년에 구두 신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인데 비즈니스 미팅이 있는 날은 평소 신던 운동화는 넣어두고 꼭 구두를 신는다. 옷은 셔츠나 블라 우스, 그도 아니면 최대한 단정한 원피스를 입고 재킷을 챙겨 입는다. 혹독하게 춥다면 그 위에 정장에 어울리는 패딩 코트를 겹쳐 입는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비즈니스 미팅 자리에 정장을 착용하는 습관은 프리랜서를 시작한 이후 한 번도 어긴 적 없다. 다른 프리랜서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내 고리타분한 습성인지 클라이언트와의 첫 만남만큼은 정장 아닌 옷을 상상할 수 없다. 제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셔츠나 블라우스를 입고 구두를 신는다. 여름 재킷을 팔에 걸고 다니다 대면하기 전 꼭 몸에 걸친다. 안경을 쓰면 인상이 딱딱해진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터라 특별히 자료를 보거나 중요한 관람이 있지 않는 한 미팅 테이블에서는 안경도 벗어놓는다.


요새는 딱딱하게 정장 입고 출근해서 몸을 혹사시키는 회사가 차츰 줄고 있는 추세라 이런 고집은 별 의미 없을 수 도 있다. 그런데도 나는 비즈니스 미팅만큼은 최대한 단정하게 입고 내 이미지를 닦아놓는다. 당신이 함께 일할 프리랜서 작가, 정규직이 아니니 매일 얼굴 보며 지낼 식구는 아니지만 적어도 업무의 한 품을 공유할 사람의 낯이 믿음직해 보이길 바라며 스스로 고집하는 차림새다. 혹여나 어떤 사정이 생겨 함께 일하지 못할지언정 수더분한 이미지로 남기 싫은 이유도 있다.


이렇게 신경 써서 입는 복장은 오로지 첫 만남, 중요한 자리에만 해당한다. 이후 업무를 시작하면 전혀 다른 차림새로 중무장한다. 이미지가 워낙 다르니 두 번째 대면에서 나를 못 알아보는 클라이언트도 종종 있었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얼굴, 믿고 일을 맡겨달라는 신뢰의 차림새는 처음 한 번이면 족하다. 이후에는 취재에 최적화된 차림새가 중요하다. 이런 복장을 나는 ‘작업복’이라 부른다.


취재를 나갈 때 상의는 무조건 셔츠를 입는다. 미팅 때 셔츠나 블라우스를 입었다면 취재 때는 무조건 셔츠다. 블라우스는 얇고 팔랑거리는 소재가 많은데 셔츠는 탄탄하고 조금 뻣뻣한 소재가 많다. 클라이언트와의 첫인상은 여차저차 잘 새겼다 해도, 취재에서 첫 대면을 하게 될 취재원이나 인터뷰이에게 대충 편한 차림으로 왔다는 인상을 줄 순 없다. 처한 환경에서 최소의 예의를 걸쳤다는 의미로 늘 셔츠를 입는다. 화장도 거부감을 주지 않기 위해 선크림과 베이스 메이크업 정도만 한다.


이때 중요한 건 셔츠의 길이다. 셔츠는 엉덩이를 덮는 긴 기장이 가장 좋고, 앞 길이보다 뒤 길이가 더 긴 정도가 괜찮다. 막상 취재현장에 가면 앉기 애매한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 잘 정돈된 사무실에서 만났는데 소파와 테이블 사이 거리가 구만리라면 노트북을 펼쳐놓고 몸을 앞으로 숙여서 워딩을 받아 적어야 한다.

한 번은 인터뷰이의 집에서 인터뷰를 하는데 공간이 여의 치 않아 노트북을 얹어놓을 테이블이나 의자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방바닥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양반다리를 하고 그 위에 노트북을 얹고 키보드를 치며 인터뷰를 했다. 이럴 때 셔츠 기장이 짧으면 보기 흉하게 위로 쑥 올라 가버리는데, 그걸 가리느라 신경 쓰게 되면 정작 해야 할 일에 집중을 못 한다.

웬만하면 바지를 입지만 더위를 많이 타기에 여름에는 치마도 입는다. 대신 치마를 입을 때도 블라우스와 마찬가지로 얇은 소재는 피하고 뻣뻣한 면이나 데님 소재만 입는다. 노트북을 넣은 백팩을 메고 얇은 소재의 치마를 입으면 말려 올라가기 일쑤라서다. 취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불타는 얼굴을 감당하고 싶지 않다면 청치마, 뻣뻣한 면 치마 등을 입는다.


한여름에 취재를 가도 샌들은 절대 신지 않는다. 취재 장소에 어떤 변동이 생길지, 갑자기 어디로 이동하게 될지 알 수 없으니 맨발이 되는 상황만큼은 피해야 한다.


어느 무더운 여름, 샌들을 신고 뻣뻣한 면 원피스를 입고 취재를 나갔다. 인터뷰이와 사무실에서 이야기할 때까진 괜찮았는데, 그의 아내도 함께 이야기를 나누자며 자택으로 이동했을 때 나만 맨발로 낯선 이의 집에 들어가야 했다.


방문한 모든 사람이 양말에 운동화를 신고 왔건만, 나만 맨발에 샌들이었다. 초면인 사람들 앞에서 맨발을, 그것도 날씨를 고려하면 신나게 땀을 흘렸을 맨발을 내놓는 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좌식 테이블이 놓인 거실에 둥글게 둘러앉아 인터뷰이의 아내가 타 온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하는 내내 무릎 꿇은 자세로 맨발을 꽁꽁 숨기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한 마디씩 했다.

“작가님, 벌서는 것 같네요.”

“맨발이 되게 부끄러운가 보네.”

옴짝달싹 못 하는 내게 인터뷰이의 아내는 웃으며 편하게 발을 뻗으라고 제안했다.

“괜찮아요. 여름인데 뭐 어때요. 편히 발 뻗고 있어요.”


그 말에 용기를 얻어 잠시 발을 뻗었는데, 동그랗게 둘러앉은 한복판에 내 맨발이 드러나자 사람들이 무의식 중에 내 발을 보며 대화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서로 어색할 때마다 시선이 내 맨발에 몰리는 것을 감지한 뒤 참을 수 없어 다시 무릎을 꿇고 끝까지 버텼다. 자택에서 나올 땐 어찌나 땀을 흘렸는지 등판이 다 젖어 있었고, 오래도록 무릎을 꿇고 있었더니 다리에 쥐가 나서 벽을 잡고 걸어 나왔다. 사람들은 뒤에서 웃는데 나는 속으로 뼈아픈 다짐을 외치고 있었다.

‘취재는 맨발 금지! 여름에도 맨발 금지! 맨발 금지!’


그날 이후 계절마다 신기 좋은 운동화를 꼭 구비해놓는다. 운동화는 최소 4켤레 정도 구비해놓는 편이다. 밑창을 제외하곤 전면이 매쉬로 되어 있어 통풍이 잘 되는 운동화 2켤레, 가죽이나 천 소재로 발이 편안하면서 적당히 보온이 되는 운동화 2켤레를 준비한다. 겨울에는 안감이 털로 된 운 동화와 가죽이나 패딩 소재로 만들어진 워커도 각 1켤레씩 더 마련하고, 낡아 떨어지면 새로 사서 채운다. 그러니 취재를 위해 반드시 마련해놓는 신발은 총 6켤레다. 덧붙이자면 신문사를 다닐 땐 취재경쟁에서 내 발을 보호하기 위해 등산화를 자주 신었다.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릴 때 발을 보호하려면 등산화만 한 게 없다.

여름철 빼놓을 수 없는 작업 복장으로는 방수가방이 있다. 비가 철철 내리는 날, 노트북 걱정을 덜기 위해 방수가방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가방 전문 브랜드에서 나오는 노트북 가방은 웬만하면 생활방수 정도는 되고 수납도 좋다. 다른 여성 작가나 기자들은 뽀얗고 예쁜 가방을 들거나 현란하게 장식된 노트북 파우치를 들고 다니는 경우도 봤는 데, 나는 그저 단단하고 방수가 잘 되고 어깨 밴드가 푹신한 남녀공용 노트북 가방만 고집한다. 마치 장마와 멋을 맞바꾼 것만 같다.


겨울에는 미안한 작업복이 필요하다. 거위에게 정말 미안한 ‘거위털 패딩’이 겨울 작업복이다. 겨울철 취재지가 실내면 문제없지만 경우에 따라 바닷가로 가서 취재와 촬영에 참여하거나 차편이 닿지 않아 많이 걸어야 하는 취재 장소라면 칼바람을 이길 재간이 없다. 이럴 땐 속에 겹겹이 입고 겉엔 무릎까지 길게 내려오는 패딩이 필수다.


언젠가 동물학대와 관련된 책을 읽었는데, 털을 뽑히는 거위가 입을 쩍 벌리고 괴로워하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날 이후 거위털 제 품과 가죽 제품을 안 쓰겠다고 다짐했지만, 한겨울 추위에 다짐을 꺾고 말았다. 긴 패딩을 두어 개 구비하고 번갈아 입으며 일을 나간다. 거위의 아픔으로 내 몸을 덥힌다고 생각하면 자신이 뻔뻔하게 느껴져 괴롭다.


이렇게 한 해 동안 고정적으로 입는 작업복이 있다. 평소 옷을 험하게 입는 편이라 필요한 작업복을 사놓고 한 계절이 지나면 잔뜩 헤져 있다. 신발은 1년 정도 신으면 나달거린다. 필요한 수량은 늘 비슷하기에 해마다 새 작업복을 채워 넣는다.


이렇게 입는 차림새가 어찌 보면 수수하고, 오로지 신체 보호와 체온 유지라는 목적만 달성하는 모양새 같기도 하다. 언젠가 일을 마치고 만난 지인이 질문한 적 있다.

“나는 작가나 기자가 취재를 나가면 트렌치코트 예쁘게 입고, 예쁜 구두 신고 나가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요. 그래도 이왕이면 잘 꾸미고 나가서 취재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예쁜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아요?”


지인의 말대로 마음만 먹으면 간만에 친구를 만나거나 데이트 나갈 때처럼 예쁜 구두에 귀여운 옷을 골라 입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입는다 해서 취재원에게 예쁜 모습으로 기억될 거라 생각하진 않는다. 나는 지금도 내가 만난 취재원들이 무엇을 입고 나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여전히 기억하는 건 그들의 옷이 아닌 얼굴, 눈빛, 웃음, 말투, 그 속에 빼곡한 진심이었다.


그 진심을 받아 적어 글로 만드는 나 역시 그들에게 옷보다 태도로 기억되지 않을까? 어제 오후 외출에서 돌아오며 여름을 느낀 나는 옷 정리를 했다. 여름 작업복을 꺼내 옷걸이에 걸고, 신발들을 점검했다. 경험하고 배운 만큼 낡아가는 작업복. 잠시 품에 안고 섬유 냄새를 맡았더니 손끝마다 힘이 솟는 기분이 들었다.


* 이 글은 지난 1월 출간한 <프리랜서지만 잘 먹고 잘 삽니다>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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