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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Apr 08. 2022

혐오표현은 어디에서 어디로 향하는가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오찬호

[도란 작가의 ‘책에 비친 여성’] 혐오표현은 어디에서 어디로 향하는가

사회학자 오찬호가 바라본 한국 남성,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나의 부끄러운 기질 중의 하나는 중년 이상 남성들의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대략 40세 이상 넘어가는 남성은 자주 본 사람이 아니면 다 비슷한 느낌이 든다. 어느 정도냐면 대학생 시절 잠시 일했던 학원 건물에서 내가 일하던 학원의 원장, 아래층 종교시설 직원, 1층 김밥집 사장의 얼굴을 구분 못 해 인사를 제때 한 적이 없다는 거다.                


오죽하면 원장이 왜 자신을 보고도 인사를 안 하냐고 물었고, 그 이후 건물에서 중년으로 보이는 모든 아저씨에게 일단 인사부터 하고 봤다. 눈썰미가 심각하게 없는 건지,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중년 남성의 얼굴은 모두 같아 보였고 지금도 달라진 건 별로 없다.          

      

이유를 생각해보건대 중년 이상의 남성을 하나의 집단을 묶는 건 무리가 있다. 남성이라는 젠더의 구분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중년 남성은 내게 어떤 의미일까. 하나씩 꼽아본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카리스마, 대한민국 남자 분석서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동양북스)

              

담배와 믹스커피가 섞인 냄새, 술에 취해 거리에서 큰소리를 치는 모습, 대중교통에서 여성의 몸매를 대놓고 훑어보는 시선, 일단 자신보다 어려 보이면 반말부터 튀어 나가고 원치 않는 조언을 일삼는 무례, 자녀와 배우자에게 깍듯이 대우할 것을 요구하는 가부장의 모습까지. 셀 수 없이 많은 부정적인 모습이 있었다. 그렇다. 이건 바로 ‘개저씨’의 일면이었다.         

       

개저씨는 ‘개 같은 아저씨’의 줄임말로 맘충, 틀딱충과 같은 혐오표현의 일종이다. 물론 내가 중년 남성의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것을 100% 개저씨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축적된 개저씨의 일면들은 중년 남성에 대한 거부감으로 작용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중년 남성은 일단 피하고 싶고, 오래 말을 섞기 싫은 대상이다. 물론 내게 따뜻하게 대해주신 어르신들과 지인 중에 중년 남성도 있지만 대략 1%에 해당하는 분들이 99%를 희석하기엔 무리일 수밖에 없다.                


개저씨는 해외에서도 인지도가 있다.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에서 한국 중년 남성들의 권위의식과 관련해 2017년 ‘개저씨(gaejeossi)’라는 단어를 등재했기 때문이다. 여러 외신에서 보도한 개저씨의 모습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반면 국내 일부 언론에서는 개저씨로 분류되는 중년 남성들을 ‘열심히 살아온 산업화의 주역이자 누군가의 아버지’로 감싸주기도 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카리스마, 대한민국 남자 분석서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동양북스)

       

이러한 개저씨를 향해 사회학자 오찬호는 혁명의 단어라 말한다. 그의 저서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는 한국 남자들이 권위주의와 경쟁주의, 폭력과 복종이 절대적인 군대생활 등을 겸험하며 소통능력과 공감능력을 상실해나가는 문제를 콕콕 짚어준다.        

        

‘꼰대질 일삼는 중년 남성’은 늘 존재했다. 다만 이를 ‘x같다’고 말하지 않으니 그것은 ‘문화’라는 이름의 보호를 받으며 ‘훈계’라는 고상한 지위를 얻었다. 낡은, 그래서 진작 없어져야 할 관습이었지만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지 못하는 분위기 덕택에 수많은 아저씨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었다. 애초에 고삐가 없었으니 야생마란 표현이 적절할까? 인간이 고삐에 구속된 채 산다는 걸 문제 삼을 수도 있겠으나 특정 성별, 그리고 특정 연령대의 누군가에게만 자유가 아닌 방종이 허락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한국의 아저씨들 중에는 자신에게 그럴 수 있는 권리가 마치 천부적으로 주어진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바로 ‘개저씨’라 한다. - 91p           


아, 이 구절을 개저씨가 읽는다면 다각도로 침을 발사해가며 상대의 버르장머리를 운운하며 무논리로 분노를 발산할 터다. 혐오표현은 당연히 대상자의 분노를 일으킨다. 다만 여기서 우리가 반성과 성찰을 할 수 있는 성인이라면 혐오표현이 어떤 계기로 누구로부터 등장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된장녀와 김치녀가 여성을 소유물처럼 뜻대로 조종할 수 없는 일부 계층이 원망을 담아 만든 표현이라면 개저씨는 조금 다르다. 낡을 대로 낡아버린 유교 문화 속에 살면서 ‘감히’ 자신보다 나이 많은 남성에게 무엇이 잘못됐는지 고하는 게 ‘버르장머리’로 분류되는 사회에서 수없이 많은 추태를 모아 만든 단어가 바로 개저씨이기 때문이다.               


개저씨는 김치녀, 된장녀, 맘충과는 성격이 완전 다르다. 이 용어들은 주로 약자를 향한 강자들의 낙인이다. 하지만 개저씨는 정반대다. 오랫동안 짓눌린 자들의 미세한 저항이 모이고 미인 이유 있는 반항이다. 지금껏 많은 이들이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의 부당함을 인지했고 비록 인터넷 공간에서 익명으로 수군거리는 수준에 불과하지만 어떻게든 피드백하는 용기를 보였다. 이 정도면 혁명적이지 않은가? - 96p              

나는 저자가 쓴 혁명의 단어라는 말에 크게 동감한다. 혐오의 방향이 약자에서 강자로 향할 때는 점검이라는 뼈아픈 계단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깨달음은 뜻하지 않게 찾아오기도 하는 것이다.         

      

아직 전염병이 해결되지 않았음에도 공원에 나가면 마스크를 쓰지 않은 중년·노년 남성이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코로나는 무섭지 않으면서 자신의 건강은 우려되는지 양팔을 휘두르며 걷기 운동을 하고 거슬리는 기합 소리를 내며 공용 운동기구를 사용한다. 그들에게 마스크를 권장하면 어김없이 익숙한 욕지거리와 분노를 돌려받을 수 있다. 개저씨와 공존하는 사회에서 나는 매일 혁명을 꿈꾼다.


http://www.women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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