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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May 02. 2022

돌봄에 지친 이들에게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김영옥

[도란 작가의 ‘책에 비친 여성’] 돌봄에 지친 이들에게

김영옥 작가의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페미니스트의 눈으로 본 노년의 시간


오미크론이 유행하면서 너나 할 것 없이 많은 집에 병마가 들이닥쳤다. 코로나19의 자택치료의 기본은 격리였다. 집 안에서 양성인 환자를 격리하고 음성인 환자들도 조심스러운 일상을 보냈다. 보통 양성인 가족이 욕실이 딸린 방에서 격리생활을 하는 듯했다. 그러면 음성인 가족들이 식사를 준비해 방 안으로 넣어주는 식으로 돌봄을 진행한다. 삼시세끼의 지옥에 빠지는 것이다. 물론 필요한 물품도 음성인 가족이 준비해 방으로 넣어줘야 한다. 


나와 남편은 운이 좋게도 아직 코로나19에 걸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속속들이 확진자 가족의 일상을 알 수 있었던 건 SNS와 미디어에 확진자 가족을 챙겨주는 과정이 수없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평소 전업주부인 여성은 가족 중에 확진자가 생기면 환자를 챙기면서 나머지 가족까지 챙기느라 정신없이 분주했다. 온 가족이 모두 양성인 경우엔 스스로 병마와 싸우며 가족의 수발을 든다.


입장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아내가 확진자가 되면 욕실이 딸린 방으로 들어가 수발을 받고 남편이 돌봄을 제공하며 아이들을 돌본다. 이때 헤프닝이 번진다. 평소 익숙지 않은 솜씨로 요리한 결과물은 폭소를 자아낸다. 자녀 돌봄은 얼마나 혼을 쏙 빼놓는 일이겠는가. 


한쪽이 전업주부가 아니라 맞벌이인 경우도 이와 비슷하게 흘러간다. 그리고 여차저차 돌봄을 해내는 남편을 기특하게(?) 여기는 게시물, 혹은 돌봄을 해낸 자신을 자화자찬하는 게시물이 흔하게 온라인을 돌아다닌다. 


이런 모습에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까? 평소 잘 하지도 않던 가사를 하느라 고생한 사람을 칭찬해줘야 맞을까? 아니면 가사를 한쪽에게 강요하고 개인적인 일만 처리하며 살아온 무능함을 꼬집어줘야 할까? 어째서 요리 못하는 여자는 흉을 볼지언정 요리 못하는 남자는 유머가 되는가? 그래서인지 엉망진창 서투른 솜씨로 요리한 남편의 실력을 자랑하는 게시물이 나는 별로 유쾌하지 못했다. 


오미크론의 자택치료 풍경에서 느낀 불쾌감은 최근 김영옥 작가의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을 읽으며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노년에 접어든 저자가 느끼는 성차별과 연령 차별을 논의한다. 그중 영화 <화장>에 대한 논의가 있다. 영화 <화장>은 죽음을 앞둔 아내 곁에서 젊은 여성을 사랑하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다. 영화에서 주장하려는 중년 남성의 입장은 아내의 병 수발에 지쳤다는 주장이다. 


가족이 아픈 것, 특히 배우자가 아픈 데 돌봄을 제공하는 건 물론 지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내의 병 수발에 지친 게 왜 젊은 여성을 사랑하는 쪽으로 변질되는 건지 도통 타당하지 않다.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김영옥 작가의 ‘흰머리 휘날리며, 예순 이후 페미니즘’ (교양인)


나는 이 분석의 초점을 ‘늙어가는 남자들’의 사랑 ‘타령’을 경유해 궁극적으로 ‘돌보는 남자들’에 맞추려 한다. 시대 환경상 어쩔 수 없이 돌봄을 맡게 된 남자들의 미성숙, 사랑이라는 알리바이로 도망치면서 돌봄의 윤리를 훼손하는 저 ‘삶에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미성숙에 말이다. - 42P


젊은 여자가 좋은 건(그것도 아내가 죽어가는 와중에) 해당 남성의 철들지 않는 심성의 문제인데 돌봄에 지쳤기 때문이라는 면죄부를 주려는 게 마뜩잖다는 거다. 만약 이게 면죄부로 적당하다면 코로나19의 자택치료 가정에 적용해볼 수 있겠다. 


배우자가 코로나19에 걸려 삼시세끼를 챙긴 가족이 지치면 외도를 해도 된다는 걸까? 그랬다면 집안에 아픈 어르신을 돌봐왔던 여성들은 모두 외도를 저지르고도 남았어야 한다. 지금껏 여자들은 자발적으로 혹은 반강제로 집안의 노약자를 돌봐왔고 엄마의 숭고함, 며느리의 도리, 현모양처 등의 무용한 평가를 받아왔다. 일생에 도움도 안 되는 그런 평가 말이다.


병들거나 늙거나 너무 어려서 또는 인간이 아니어서 스스로 생존하지 못하는 몸들을 돌보는 일이 삶에 철드는 일임을 어떻게 보편적 지식이나 지혜로 만들 수 있을까 질문한다. 돌봄 위기가 보편화되고 있는 이 시대에 돌봄의 가치를 어떻게 하면 시대 정신으로 세울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돌봄을 중심으로 대전환을 구상할 수 있을까. - 60P


돌봄은 면죄부가 아니다. 아내가 재택치료를 하는 동안 가사를 맡은 남편은 자신이 외면해온 가정의 일부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반성해야 한다. “없는 솜씨나마 뭔가 해줬다.”라며 홍보할 게 아니라 “그동안 내가 착각하고 있었구나.”라고 반성의 글귀를 적어야 한다. 요리를 못하는 건 그렇다 쳐도 최소한 자녀의 돌봄에 있어서라도 말이다. 돌봄이 여성의 영역이거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오판을 휩쓰는 데 바이러스마저 동조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http://www.women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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