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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을 통해 인간다움을 찾는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하재영

by 귀리밥

타인과 대화를 할 때 거르는 말이 있다.


“나도 애견인이지만-”

“나도 개를 좋아하지만-”


그다음 나오는 말은 안 봐도 훤하다. 나도 개를 좋아하지만 개의 이러이러한 점은 싫다, 개는 이래야 한다, 개한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좀 그렇다.


사실 나는 아이를 안 좋아한다. 하지만 아이 즉 미성년자는 사회적 약자이기에 보호해야 하고 상처 없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성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약자를 보호하는 데 좋고 싫고 이런 감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직 미성숙한 아이들은 약자다. 인간 중심 세상에서 동물은 약자다. 약자를 보호하는 건 비교적 강자의 당연한 책무다. 그러니 ‘나도 애견인’이라면서 이런저런 잣대를 대는 사람은 약자를 외면하면서 나이만 먹은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이런 내 생각을 하재영 작가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에서 좀 더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동물의 고통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사람들을 ‘동물애호가’라 부르면서 이 문제를 호불호의 영역으로 끌어내린다. 동물과 관련된 사안을 감상주의고 치부하게 만들 뿐 아니라 취향의 문제로 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씽어의 말처럼 동물 애호가라는 표현은 정치적이고 도덕적인 논의로부터 인간이 아닌 존재를 배재한다. 동물을 쾌락과 고통을 느끼는 존재로 인식하고 연민을 확장하는 일은 사랑하고 좋아하는 감정과 별개인 것이다. 특정한 종의 동물을 좋아하는 것은 취향이더라도 누군가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은 취향과 아무 상관없다.


작가는 버려질 뻔한 개 피피와 함께 살면서 여러 의문을 가진다. 버리지는 개의 삶은? 동물은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가? 여러 질문은 ‘인간다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그는 번식장, 개농장, 보호소, 경매장, 간접적으로 도살장까지 버려지는 혹은 살육을 목적으로 키워진 개들을 목격한다. 이중 무엇 하나만 고쳐서 개가 고통받는 시대가 끝나진 않을 것 같다. 서로 연결돼 있는 지독한 악습은 경악할 만큼 끔찍하다. 인간이 이렇게까지 더럽고 잔인할 수 있나 멍해지는 풍경을 서술하면서 작가는 우리에게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는 것 같다. 이걸 알고도 개 식용을 문화라고 할 수 있냐며, 계속 펫숍을 이용할 거냐며, 응당 동물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생각을 고수할 거냐며.


작가는 동물을 존중하는 일과 인간을 존중하는 일이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인간이라는 종 안에서도 다양한 강자와 약자가 존재하며 약자를 존중해야 한다는 당연한 함의가 있듯, 인간 중심 세상에서 동물은 약자다. 만약 세상이 동물 중심이고 인간이 소수였다면 어땠을까? 강제로 성관계를 당해서 쉼 없이 아이를 낳고 더러운 칼로 배를 가르고 죽으면 땅에 묻어버리고 심지어 사람을 잡아먹으면서 “개가 먼저다”라고 말하는 개를 상상해 본다. 끔찍하지 않은가. 사람만이 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다.


이런 얘기가 나오면 지긋지긋하게 나오는 말이 또 하나 있다.

소는? 돼지는? 닭은?


예를 들어 개 식용을 찬성하며 “소, 돼지, 닭은?”이라고 묻는 사람들은 모순된 현실(개와 고양이는 사랑받고 소, 돼지, 닭은 착취당하는 현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한쪽을 그릇된 일로 치부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농장동물의 착취를 비판하는 것이 더 옳겠지만 그가 육식을 한다면 그것은 불편한 일이다. 그래서 농장동물이 당하는 가학 행위에는 침묵하는 반면 개식용에 반대하는 사람은 위선자라고 비난한다.
<중락>
바로 이 “전부 아니면 전무”를 자격의 기준으로 삼는 극단적인 사고방식이 동물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면 개식용을 반대할 자격이 없다. 가죽 제품을 사용한다면 모피를 반대할 자격이 없다. 일관성 있게 소비하거나 일관성 있게 소비하지 말아야 한다.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 해서 차선을 행하면 안 되는 걸까? 최악을 피하기 위해 차악을 고르면 안 되는 걸까? 개의 고통을 말하기 위해 세상 모든 동물을 구조해야만 하는 걸까? 소 돼지 닭을 운운하는 이들의 비겁함을 난 아주 잘 알고 있다. 자신의 비겁함을 가리기 위해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측은하기까지 하다.

나에게 동물권을 알려준 소중한 모카
동물실험에 반대하는 국제 동물보호단체인 ‘크루얼티 프리 인터내셔널’이 공개한 영상에서는 드레이즈 테스트를 위해 상자에 갇힌 토끼가 목을 돌려 옆에서 같은 일을 당하고 있는 친구의 눈을 정성스레 핥아주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에 의문을 품게 만든다. 우리는 ‘짐승 같다’는 표현을 잔인함으로, ‘인간적’이라는 표현을 도덕적인 무엇으로 사용하지만 저 영상 속에서 인간적인 것은 누구인가? 극도의 고통 속에서도 같은 처지의 친구를 돌보는 토끼인가, 아니면 토끼를 고통으로 몰아넣는 인간인가?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사람들이 몰라서 묻는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 실천해야 하며 그로 인한 귀찮음을 감당할 수 있는가의 고민 앞에서 외면이 훨씬 편리할 따름이다.


나는 하루에 1~2끼는 채식으로 한다. 가능하면 3번 모두 채식한다. 동물권을 이해하기에 동물 섭취를 줄여보는 것이다. 펫숍을 이용하려는 사람에게 번식장과 경매장의 실태를 알린다. 동물을 구조하는 단체에 물품과 후원금을 전한다. 동물실험 제품을 사지 않는다. 사실 내가 하는 일들도 아주 미미한 솜털 같은 수준이다.


동물보호를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결국 타자의 고통에 더 마음이 아픈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걸 감당하기엔 ‘짐승 같은’ 인간 때문에 고통받은 ‘진짜 짐승’이 기하급수적으로 많다. 그렇다면 늘 외면하기만 했던 자신을 돌아보는 것으로 우리가 조금은 인간다워질 순 없는 걸까? 동물을 통해 인간다움을 깨달을 수 있다면 그 역시 괜찮은 계기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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