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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Nov 06. 2017

포근함을 준비했다

우리 가족, 겨우내 건강하고 따뜻하게.


드디어 온다. 오고 있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좋아하는 ‘겨울’이 지금 오고 있다.

겨울, 이름도 고운 이 계절을 사계 중 가장 아름답다고 느낀다. 꽃 피우는 봄은 영롱하지만 짧고, 각 생명체들이 노력해 만드는 아름다움이 피곤하다. 여름의 피로는 말할 것도 없다. 가을의 아름다움은 모든 것을 끝내기 전 발악처럼 화려하다.


그리고 다가온 겨울은 모든 것을 체념하듯 온순하다. 고요한 아름다움과 아득함도 있다. 난 이 고요한 아름다움을 으뜸으로 느낀다. 끝없이 떨어지는 눈은 세상에 공평하다. 시끄럽지 않게 얕은 소리만 낸다. 찬바람은 세상을 쓸어내고 잡균을 치우고 가쁜 습기를 걷어낸다. 건조해서 작은 소리도 울리도록 차분하게 세상을 다듬는다. 정직한 아름다움이 있다면 그것은 겨울에 있다. 겨울 참 좋다.




계절만으로도 참 좋지만 겨울이 되면 만나는 것들을 좋아하기에 더욱 이 계절을 아끼는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거창하게 ‘월동준비’라는 표현을 썼다. 차가운 기후로 돌변할 즈음에 뉴스를 틀면 이 말이 어렵지 않게 들렸다.


어릴 적, 엄마는 이 월동준비에 굉장한 노동력과 금전을 소비한 기억이 난다. 다섯 식구가 겨우내 먹을 식재료를 준비하고, 옷가지와 난방연료를 문제없이 준비했다. 늦가을부터 장사를 쉬던 엄마는 집에 있어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뜨개질이었다. 어디선가 실 뭉텅이를 가득 가져온 엄마는 아빠의 스웨터, 언니들과 나의 조끼를 쉼 없이 떴다.


말수도 많지 않은 분이라 조용히 뜨개질만 하셨다. 학교에 입학하기 전 나는 조용히 뜨개질하는 엄마의 원피스 자락을 만지기도 하고, 방안을 굴러다니며 심심하다는 표현을 온몸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그래도 심심하면 마당으로 나가 개와 놀았다.


엄마가 뜨개질을 한 그 결과물을 내가 오래도록 기억하는 이유는 매년 모양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아빠가 입던 스웨터의 일부가 닳아 낡으면 엄마는 스웨터를 풀어 다시 실 뭉텅이로 만든다. 낡아 헤진 실은 끊어 묶은 다음 다시 목도리나 벙어리장갑을 만든다. 우리가 자라면서 작아진 조끼도 다시 풀어 실을 잇고, 두 가지 색이 섞인 스웨터를 만들곤 했다. 그러고도 남은 실은 둥글게 방석으로 만들어 학교 의자에 매달아두게끔 시키셨다. 전년도 겨울에 입던 내 조끼는 다음 해 겨울에 스웨터 윗부분을 이루고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흰 실이 드문드문 섞인 푸른색 스웨터였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는 조끼로 바뀌었고, 그다음 해에는 목도리로 변신해 있었다. 목도리와 방석으로의 변신은 실과의 이별이 예고되는 단계다. 너무 낡고 헤져, 회생이 어려울 때 그 실은 차근히 이별을 준비하는 목도리가 된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겨울이면 포근한 열기를 뿜는 난로가 사랑스럽다.


월동준비에 빠지지 않는 것에는 식재료도 있는데, 우리 집은 보통 쌀과 김치, 감자, 생선 등을 대량 구입해 쟁여두는 방식이었다. 쌀은 80kg의 가마니를 4개쯤 사서 마루 한 귀퉁이에 세워둔다. 엄마는 쟁여둔 쌀을 보며 ‘이 정도면 완벽해!’라는 표정으로 흐뭇해했다.


김치는 김장 때 배추 200포기나 담가 마당 화단의 흙 속에 묻어두곤 했다. 식구가 많고, 다들 식사량이 적지도 않은 편이라 겨울철 꼭 필요한 반찬은 김치였다. 식사 준비 시간에 김장김치를 가져오는 심부름은 보통 둘째 언니가 했지만, 간혹 언니의 압력을 피하지 못할 땐 내가 가지러 나가기도 했다.


귀찮아서 내복 바람에 양푼을 들고 김치를 꺼내려면 화단 바닥에 몸을 밀착하고 팔을 뻗어 넣어야 한다. 나무가 군데군데 심어진 화단에 엎드리듯 누워 김치 구덩이에 팔을 넣는다. 김치를 꺼내고 집으로 들어와 밝은 불에 보면 내 한 쪽팔 내복에는 고춧가루가 흐드러지게 묻어 있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한 나는 10살이 넘어서까지 엄마 옆에서 자야 했다. 겁이 많다거나, 무서운 꿈을 꾼다는 그런 귀엽고 앙큼한 이유가 아니라 건강이 좋지 못해서 수시로 엄마의 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감기에 잘 걸리고, 걸핏하면 앓아눕는 나를 혼자 자게 뒀다간 다음날 큰일을 치러야 함을 아는 엄마는 겨울철이면 항상 감각의 안테나를 곧게 세우고 지냈다.


월동준비와 함께 엄마의 화장대에는 늘 내 몫의 감기 시럽약이 놓여 있었다. 기침소리가 평소답지 않으면 자다 일어나서 내게 약을 먹이셨다. 한 번씩 열이 심하게 나서 앓다 깨 보면 엄마는 늘 곁에 앉아 졸고 계셨다. 얼굴 위에 얹어진 수건은 항상 촉촉했다.


또 엄마는 겨울철이면 유난히 뜨거운 국물요리를 많이 만들고, 집안에서 시루로 떡을 만드셨다. 뜨거움이 가시기 전에 주신 분량을 다 먹지 않으면 앞니를 살짝 드러내며 곤란한 표정을 지으셨다. 꼭 뜨거울 때 먹어야 했다. 일종의 부적이었다.


‘겨우내’라는 말은 ‘한 겨울 계절이 끝날 때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엄마의 월동준비를 지켜보고, 준비된 식량과 노동력을 소비하면서 나는 ‘겨우내’라는 말의 의미를 몸으로 익혔다.


겨울이란 이런 것, 쌓아둔 것을 검소하게 사용하고 다른 계절보다 몸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한 계절. 뜨거운 것을 아무리 먹어도 엄마의 걱정이 줄지 않는 날들. 준비해둔 수많은 것들이 사라질 무렵은 눈이 녹아 없어지는 시기와 맞닿아 있다는 것. 한 번씩 월동준비를 하고 모두 소비하고 나면 엄마가 조금 더 늙어있다는 것.




결혼을 한 후 내게도 월동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사실 겨울 준비, 겨울 단장 등의 말도 있겠지만 촌스럽게도 ‘월동준비’라고 말을 해야 알아들을 수 있는 몇 가지 준비사항들이 떠오른다. 어제 저녁 외출 후 들어올 때 유난히 찬바람이 심하기에, 겨울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느꼈다. 그래서 월동준비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일단 오늘 아침부터. 평소 주말이라면 간단한 토스트 정도를 먹어도 되겠지만, 오늘은 특별히 뜨거운 음식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요리책을 펼쳐놓고 ‘돈지루’를 만들기로 한다.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에서 딱 하나 정해둔 메뉴, 오프닝에서 그 맛있어 보이는 국물요리 말이다. 야채와 고기를 잘게 썰어 넣고 미소된장을 넉넉히 풀어 돈지루를 만든다. 뜨거운 돈지루를 만든 다음 남편을 부른다. 아침을 먹고 나니 따뜻함이 몸 안 구석구석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는 느낌이다.


저녁에는 청소 후 가습기와 온수매트를 꺼내 설치했다. 이런 장비 없이는 새벽 추위에 잠을 깰 날씨. 남편의 비염이 심해질 때 마시기 좋은 사과계피차를 꺼냈다. 사과, 계피, 꿀을 넣어 만드는 것인데, 미리 넉넉하게 만들어두길 잘했다. 두터운 스웨터가 어색하지 않은 날씨가 왔으니, 당장 내일 아침 출근길에 입을 옷들을 장롱 앞쪽에 꺼내 둔다. 도톰한 재킷도 나쁘지 않겠다.


늦은 밤에는 온수매트를 켜고 그 위에서 남편과 덖음차를 마셨다. 씁쓸한 맛이 나기 직전까지 차를 우려 마셨다. 이 정도면 월동준비가 된 걸까? 방 안을 둘러봤다. 포근함이 준비됐다.


커튼을 조금 열어보니 달이 차게 떠있다. 우리 가정이 겨우내 건강하게, 따뜻하게. 이제 뜨개질은 하지 않는 엄마도 조금 떨어진 도시에서 따뜻하길. 새벽에 깨지 않고 가족들 모두가 평안히 잘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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