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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Nov 03. 2017

사랑받고 싶은 본능

사랑해 달라고, 그러니 나 좀 알아봐 달라고.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망, 이왕이면 다수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이것은 본능일까? 누군가 내게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라고 말했을 때,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해보자. 어쩐지 곱지 못한, 그 욕망을 이해하지 못해 거부감이 일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본능이라고 생각한다. 말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확실히 이해되는 감각으로써의 본능이다.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망은 매우 일상적이다. 누군가에게 사랑 고백을 받거나, 소소한 행동으로 칭찬을 받았을 때 즐거워진다. 사랑의 시작이 일방적일 경우엔 욕망이 더욱 강렬하다. 갓 태어난 아기의 눈총을 받고 싶은 어른의 우스꽝스러운 몸짓과 어른의 사랑을 받고 싶은 어린아이의 재롱은 본능이다.


우습지만 학창 시절 인기투표에서 1등 해본 사람은 그 본능을 즐겼을 것이다. 여러 명의 이성에게 구애를 받는 사람은 귀찮다거나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며 겸손을 표현한들 그 내면에는 즐거움이 가득하다. 사랑받아 싫은 사람은 없다. 만약 싫은 감정이라면 사랑을 주는 주체가 싫은 것이지 사랑 자체가 싫진 않다. 부정하는 것은 사실 그 본능을 스스로 알기에, 본인도 무의식 속에 경험했기에 부끄러워 그런 거라고 짐작한다.


언젠가 동호회에서 만난 동생이 이런 말을 했다.

“언니, 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고 모두와 친하고 싶어요. 그래서 모두에게 잘 해주고 모임도 엄청 나가요. 소중한 친구가 많고, 모두와 친해요. 물론 피곤해요. 나도 이런 내가 좀 이상하지만 모두에게 사랑받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요. 게다가 누가 날 싫어한다고 생각하면 참기가 힘들어요.”


그때 나는 겸허한 사람인 냥 대꾸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다고 행복으로 환산되지는 않잖아? 그 마음을 편하게 먹으면 좋겠다.”


이제야 고백하자면 나는 극도로 가식을 떨었고, 동생은 솔직했던 것이다. 동생은 타인 그리고 다수에게 사랑받고 싶은 본능을 스스럼없이 표현했다. 반면 나는 ‘그 사랑받아 뭐해?’ 정도의 자세로 대응했다.


그게 왜 가식이었냐면 겸허한 척 말을 하는 순간 나는 그 동생에게 나이가 좀 더 있는 언니의 모습, 담담하고 세상을 수수하게 바라보는 언니인 척하고 싶었다는 점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 척이야말로 솔직한 동생,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었음을 알아버린 것이다. 세상 부끄럽다.




누군가 많은 사랑을 받고 싶다고 표현할 때, 그 사람을 흉보는 이들 역시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왜 저렇게까지 사랑받으려고 애쓰냐고 비난하면서 자신은 타인의 사랑에 겸허한 척, 관심 없는 척하 담담한 사람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그런 자신으로 다시 한번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본능을 외면한다. 자신을 포장하고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것, 그래서 겸손한 언어를 골라 쓰는 것이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편이 오히려 멋있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나 역시 타인에게, 그것도 많은 타인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한 일이 꽤 많았다. 흔한 경우로 할 말은 A인데 B를 말하는 경우다.


예를 들어 “넌 정말 너 밖에 모르는구나!”라고 꼬집고 싶은데 친구의 신뢰와 호감을 져버릴까 봐 “너 신념이 뚜렷하구나!”로 바꿔 말한다.

또 “너 참 일 못한다. 몇 시간 들여서 한 게 고작 이거야?”라고 하고 싶지만 “오, 잘 했네? 다음엔 이걸 참고하면 더 완벽하겠어!”라며 착한 선배인 척한다.

어느 언론의 왜곡기사를 보고 이년, 저년 욕하는 친구에게 “야 이, 꼰대 자식아. 조사도 제대로 안 하고 왜 욕질이야?”라고 하는 대신, “내가 알기에 다른 면도 있다고 알고 있어.”라고 말하며 선한 친구 연기를 한다.


주변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 하고 싶은 말도 솔직하게 못 하면서 사랑받고 싶다는 동생에게 행복으로 환산되지 않는다는 둥 점잔을 빼다니! 다시 생각해도 부끄러운 순간이다. 차라리 나도 그렇다고 말했으면 이렇게 두고두고 후회할 일은 없었을 테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타인에게 사랑받는 것이 절실한 사람들이 있다. 주로 연예인이나 정치인이다. 이들이야말로 타인에게 사랑받지 않으면 직업에 의미가 별로 없다. 물론 아티스트로서 예술 활동에 몰입하거나, 정치인으로서 자신의 행보와 업적을 위해 일하는 이들도 많지만 결국 그 일들도 타인이 알아주지 않으면 유독 고생스럽다.


한 때 차기 대권주자라며 대선후보로 논의됐던 사람들을 보면 정말 사랑받느라 애쓰는 게 눈에 보였다.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렬한데 그걸 어찌 표현해야 효과적인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모양이랄까.


잠시 후보로 논의됐던 70세의 후보는 80세 정도 되는 노인의 다리를 주무르며 “할머니, 오래 사세요!”를 외쳤다. 본인도 “오래 사세요”를 들을 나이인데 사랑받기 위해 애쓰려다 보니 뭔가 어색함이 들통난다. 부실한 정권의 부역자로 몰린 몇몇 정치인들은 쇄신을 외치며 기자회견 자리에서 단체로 큰절을 했다. 그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접할 대중들에게 “우리 좀 사랑해줘! 응? 사랑 좀 해줘, 제발!”이라며 비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사랑이란 게 달란다고 주고, 해달라고 할 수 있나. 경험해본 사람들은 다 안다. 사랑이란 게 ‘지금부터 시작해야지!’라고 마음먹는다고 시작되지 않는다.


신망이 두터운 유명 정치인들 역시 사랑해달라고 무진장 애쓰는데, 그나마 덜 어색하다. 몇 푼 월급에 인권이며 노동력이며 착취당하는 군인들을 방문해서 함께 총을 쏘고 대화를 해도 억지스럽지 않다. 양로원 노인들과 카드놀이를 해도 어색하지 않게 패를 돌린다.


그 사람들은 사랑받는 게 고단하긴 해도 차라리 솔직한 것이다. 내게 솔직한 고백을 한 그 동생처럼. 그 정치인들은 “그래요. 저는 사랑받고 싶어요. 그래서 여기 왔어요. 사랑받으려고 애쓰긴 하는데 어색해요.”라고 고백하는 말투가 얽혀있다.




내가 요즘 하는 모바일 게임이 있다. 여기서 게임을 작동하기 위한 아이템은 하트, 캐릭터를 사기 위한 아이템은 보석 등이 있다. 정치인이 받는 사랑은 게임의 하트와 닮았다. 무언가를  시작하기 위한 동력, 힘을 발휘하기 위한 기초체력처럼 하트를 모은다. 하트는 동력이자 기초체력이지만 소모도 빠르다. 다시 모으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손을 놀려야 한다. 꼭 필요하지만 금방 흩날리는 낭창낭창한 사랑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받는 사랑은 보석과 닮았다. 나의 분신과 같은 캐릭터를 사기 위한 보석, 새로운 캐릭터로 진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 그래서인지 보석은 따는 데 오래 걸린다. 그래도 일단 따면 효용가치가 꽤 오래간다. 따더라도 사용할 때는 어찌나 망설여지는지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는 나도 타인에게 나를 알리고 사랑받고 싶어 쓰는 것이 맞다. 이제는 솔직하게 말하는 게 멋지다는 걸 알아버렸으니까 말한다. 나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고, 그래서 쓰는 거고, 사랑해달라고. 그러니 나 좀 알아봐 달라고 털어놓는 것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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