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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Nov 27. 2017

우리 집 연하남

가장 가까운 가족, 남편


일자리를 위해 이력서를 내거나 처음 보는 사람이 나의 결혼에 대해 질문할 때 대체로 비슷한 질문을 하고 놀라는 척을 한다.

“어머, 남편분이 연하시네요?”


요즘은 연상연하 커플도 많다는데 여전히 사람들은 여자가 나이가 많은 커플, 부부에 대해 조금씩 놀란다. 저 질문 다음으로 많이 듣는 말은 이 말이다.

“연하랑 결혼도 하고 능력 있으시네요.”


이 말은 썩 기분 좋지는 않다. 거기서 말하는 ‘능력’이란 것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으니 말이다. 함께하는 이성의 나이가 어린 게 나의 능력이 좋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상대의 나이가 어린것은 경쟁력이 될 수 없다. 혹여나 자랑거리가 되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다. 간혹 자신보다 나이가 많이 어린 여자 친구 이야기를 하며 으스대는 한심한 남자들을 많이 봐와서인지, 나는 단지 남편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능력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영 껄끄럽다.




남편은 나보다 네 살이 어리다. ‘남자는 애다’, ‘여자보다 정신연령이 낮다’라고 주장하며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나야 수준이 맞는다고 조언하는 어른들이 많았다. 그런데 나는 어쩌다 보니 연애를 할 때마다 상대의 나이가 적었다.


그래서 한 번 마음먹고 두어 살 많은 남자를 잠시 사귄 적이 있었다. 물론 한 번의 경험이 지론으로 일반화되는 건 좋은 판단이 아니지만, 당시 나는 하루빨리 관계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나이가 많으면 수준이 맞는다는 조언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나이’ 앞에 정론은 없었다.


그 경험 이후로 나는 누굴 만나든 나이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나보다 열 살이 많든, 열 살이 적든 즐겁게 지낼 사람을 만나는 게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됐다.

친구들과 각자 이상형을 이야기하면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다. 존경할 수 있는 남자, 경제적 능력이 좋은 남자, 부모님 성품이 좋은 남자, 무조건 잘 생긴 남자 등등. 나는 딱 한 가지였다. 같이 있을 때 즐거워야 할 것. 물론 금기 조건도 있었다. 거짓말하는 남자는 절대 만나지 않겠다는 조건이었다.


그동안 사귀거나 몇 번 만난 남자들은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그들의 ‘어림’은 내게 즐거움이었다. 나보다 젊은 사람들의 생각을 듣는 건 재밌으니 말이다. 내가 겪지 않은 그들 시대의 이야기는 일종의 소득과 같았다. 어쩌다 서로 애처럼 굴긴 해도 그건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연인 사이에 어느 정도 허용되는 것이 아닐까?


나이가 어려도 관계에 대한 책임감이 있었고, 대체적으로 선량했다. 몇 년의 시대 차이가 있어도 각자 꿈꾸는 미래를 이야기하고, 학업과 일에 깊이를 주는 것은 모두 같았다. 그들이 몇 살 많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했을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어려워하거나 늙은 사람으로 불편해하지 않았을 거라 믿는다.


언젠가 결혼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꼭 현재의 연인인 서로가 아니라 해도 서운하거나 슬플 것 같진 않았다. 각자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살았을 뿐이다. 나이 많은 내가 나이 적은 그들을 옭아맬 욕심이 없으니, 그들도 자유롭게 감정을 키우며 연애했다고 생각한다.


제주도에서 남표니 :)


남편을 처음 알게 될 무렵, 우리는 서로 취향이 비슷한 지인 수준이었다. 일 년쯤 지나 서로 호감이 생기고, 연인 관계로 이어졌지만 남편은 내게 ‘누나’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이제 생각하면 조금 우습지만 그 시절 남편은 ‘독신주의자’였다. 혹은 삼십 대 후반쯤 느지막이 결혼을 할 거라고도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런 다짐이 얼마나 쓸모없는 건지 알겠다. 남편은 스물여덟 살에 나와 결혼했다.


결혼하고도 남편은 종종 나를 누나라고 불렀다. 그럴 땐 내가 연하남과 결혼했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나의 이력서 하단 가족관계를 쓰는 칸은 엄마와 언니들의 이력이 적혀있었지만, 혼인신고를 마친 뒤 바로 수정했다.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서 남편이 하나 생겼다. 가족관계에 남편의 이름과 생년월일, 동거여부, 직업을 적었다. 평생 함께할 연하 남편이 생겼다.




다만 세대 차이를 느끼는 일이 아주 가끔 발생했다. 어느 날 올림픽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88 올림픽 당시 개막식에 나온 굴렁쇠 어린이 이야기를 꺼냈다.


“왜 그때 88 올림픽 때 굴렁쇠 어린이 있잖아. 지금 완전 아저씨겠지? 나 그때 텔레비전으로 굴렁쇠 어린이 보면서 엄청 부러워했는데.”

“굴렁쇠 어린이가 뭐야?”

남편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굴렁쇠 어린이가 뭐냐고 물어봤다.


“개막식 때 나와서 굴렁쇠 굴리면서 운동장 가로지른 애 있잖아.”

“음, 올림픽이 몇 년도였지?”

“1988년이잖아!”

“여보, 나 그때 보자기에 싸여서 바닥에 누워 있었을 거야.”


음? 생각해보니 남편은 1987년 12월생이다. 올림픽으로 나라가 뜨겁던 시절, 아기 보에 싸여 남편은 바닥에 누워 모빌이나 쳐다보고 있었을 거다. 나는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 사이에 88 올림픽이라는 극복할 수 없는 세대차이가 느껴졌다.


한 번은 서로의 수학능력시험에 대해 이야기했다. 재수까지 했던 내가 시험을 망치고 몇 점이 나왔다고 털어놨는데 남편이 비웃었다.

“여보 그 정도면 낙제 아냐? 그래도 다행히 대학은 갔네!”

“어머, 여보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여보는 수능 몇 점인데?”


남편의 수능 점수를 듣고 보니 뭔가 좀 이상했다. 400점이 넘었다고? 수능은 400점 만점인데? 다시 얘길 해보니 남편과 나의 격차 사이에 교육과정이 개정되고, 수능 총점도 바뀌었던 것이다. 나는 400점 만점 세대, 남편은 500점 만점 세대. 얼굴이 화닥거렸다. 서로 비교할 수 없는 수능을 쳤구나. 그 후로 우리는 수능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세대차이나 나이로 인한 불협화음이 별로 없는 우리 부부 사이에 나 혼자 애태우며 걱정하는 게 한 가지 있다. 나이와 잔병이 많은 내가 어린 남편을 두고 먼저 죽을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남편은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그런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가끔 잠든 남편 얼굴을 보면 슬픈 생각이 들곤 한다.


‘내가 먼저 죽으면 남편은 슬프고 쓸쓸하게 살겠지.’

‘내가 먼저 죽으면 밥도 안 해 먹고 아이스크림이나 먹고 영양실조에 걸릴 텐데.’

‘내가 먼저 죽으면 독한 술이나 먹고, 몸이 아파도 돌봐줄 사람도 없을 텐데 어쩌나.’

‘허구한 날 화장실 가서 휴지 없다고 부르는 사람인데, 나 없으면 휴지 어떡해?’


마치 꿈만 같이 같은 날 죽으면 좋겠지만 그럴 일은 없으니까. 그래도 남편이 건강하고 오래 살길 바라니 내가 먼저 죽는 게 좋을 것 같고, 한편으로는 혼자 남아 슬퍼할 남편을 생각하면 내가 조금 더 오래 살면서 혼자 괴로운 편이 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말이다. 혹시나 내가 먼저 죽게 되면 남편이 재혼은 3년 뒤에 했으면 좋겠다. 최소 3년은 날 추모하면서 말이야, 응?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진심이니 별 수 없다. 오늘 우리 집 연하남이 집에 오면 꼭 당부하고 대답을 들어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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