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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귀리밥 Dec 01. 2017

개운치 않았던 양보

우리는 그러지 말자고.


지난해 이맘쯤 이사를 온 곳은 우리나라의 북쪽에 위치하고, 한 나라로 말하기 어색한 북한 밀접한 파주시다. 우리 부부가 파주에 이사를 간다고 결정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모두 하나같이 ‘그 먼 곳에 왜?’였다.


우리는 연고지에 별다른 애착이나 흥미를 못 느끼기 때문에 신혼집을 구할 때도 그랬고, 편리한 생활을 기준으로 살 곳을 정한다. 집을 구하며 중요시하는 점은 살기에 적당한 곳, 일상이 불편하지 않을 집의 구조, 볕이 잘 드는 방향, 대중교통의 가짓수 정도다.

가족들과 멀어져 속상하지 않나, 일하러 다니기 힘들지 않나 등의 말은 귓가에 가닿지도 않았다. 그 정도로 나에겐 연고지가 어떤 의미나 고민의 소재가 되지 못한다.


나는 멀미가 심한 편이니 버스를 잘 타지 못하고, 주로 전철을 탄다. 그래서 전철역이 가까운 곳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전철에서는 유독 한 가지로 인해 마음이 불편해진다. 양보의 권장 혹은 양보의 강요 때문이다. 세상에는 정말 많은 도덕적 행위와 잣대가 있다. 그중에서 ‘노인 공경’이 강요되는 곳이 전철이다. 버스도 크게 다를 바는 없다.




노약자석은 이미 오래전 노인석이 됐다. 노인을 포함한 약자가 앉을 수 있도록 배려한 장소인데, 노인들은 부득부득 ‘노인석’으로 여긴다. 약자 중에는 몸이 불편한 사람과 임산부도 있을 텐데 노약자석에 앉으면 고함을 치는 할아버지부터 반말로 잔소리를 하는 할머니를 숱하게 봤다. 몸이 불편하고 짐이 많은 사람을 위해 설치된 엘리베이터는 걷기 귀찮은 노인으로 가득하다.


어쩌다 임산부나 짐이 많은 젊은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타면 따가운 눈초리와 욕설을 받아야 한다. 가끔 뉴스에서도 노약자석에 앉은 임산부를 때리고 욕설을 퍼붓는 노인들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나를 포함한 누구나 아플 수 있다. 그런 이유를 포함해 여러 가지 이유로 대중교통에는 의자가 마련돼 있다. 언젠가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하고 전철에 탔을 때 노약자석도 아닌 일반 좌석에 앉아있음에도 자리를 탐내는 할머니는 내 다리를 발로 툭툭 찼다. 깁스가 뻔히 보이는 나를 밀치고 앉는 노인도 있었다. 


평소의 어느 날엔 앉아서 졸고 있는 내 앞에서 자리를 탐내는 할아버지가 침을 튀기며 크게 기침을 하고, 그럼에도 일어나지 않은 나를 노려보기까지 했다. 무거운 가방을 무릎에 놓고 앉아있던 내게 ‘싸가지가 없다’며 일어나라고  호통 치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공평하게 교통비를 지불하고 들어온 전철인데 양보를 강요하는 사람들을 보면 꽤나 불쾌하다. 게다가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이런 강요를 더욱 자주 받는다고 느낀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따로 걸러 전철에 못 타게 할 것도 아니라면 참아야 하는 건 내 쪽이다.



그런데 요즘은 나처럼 양보를 강요받는 데 지친 사람이 많은 모양이다. 타당치 못한 양보 문화에 질릴 만큼 질린 나 같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닌 것이다. 노인들의 대중교통 무임승차가 안 그래도 복잡한 전철을 더욱 혼잡하게 만들고, 불편한 사람들이 맘 편히 이용 못하는 요인으로 노인을 지목하는 의견이 공공연하다. 조금씩 오르는 대중교통 요금이 양보를 강요하는 노인들의 편의사항으로 둔갑한다는 듯 무임승차를 없애야 한다고 온라인에서 목소리를 높인다.


여러 차례 곤란한 일을 겪었더니 나도 슬그머니 그 목소리에 동참한다. 여전히 전철에서 노인들은 강제로 자리를 양보받고 그 자리에 늙은 다리를 놓고 득의양양하지만, 전철 안의 공기는 무작정 노인 공경을 외치던 과거와 달리 싸늘해졌다. 말로 꺼내지 않을 뿐이지 속으로는 억지로 자리를 넘겨받은 사람을 욕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욕설이 겉으로 흘러나오는 날도 머지않았다고 예감한다. 세대의 대립각은 예상치 못하게 일상적인 곳에서 칼날을 세울 수 있다. 그리고 그 칼날은 회복이 어려울 만큼 깊은 상처를 남길지 모른다. 나이가 면죄부가 아님을 인지하는 사람들의 콧김이 뜨겁다. 언젠가 터질 압력솥처럼 끓어오르는 중이라고 느낀다.


더불어 교과과정에서 가르치는 양보에 대한 인식도 새로이 가르쳐야 하지 않나 싶다. 학창 시절 ‘도덕’ 교과서에서는 노인을 보면 자동으로 일어나야 하는 양보문화를 옳다고 적어두고, 양보를 하지 않으면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으로 분류했다. 도덕을 책으로 가르친다는 것도 우습지만, 양보를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사항으로 가르친다는 것도 참 이상하다.


방송에서도 착한 역할의 배우는 버스나 전철에서 웃으며 자리를 양보하고, 양보하지 않는 역할의 배우는 극 중에서나마 “너는 어미, 아비도 없냐.”는 고함을 듣는다. 이런 것은 대체 누구를 위한 양보문화였을까. 원치 않는 양보는 이미 양보가 아니다.




이 집을 보러 오던 날도 전철을 탔다. 몹시 더운 여름날이었는데, 혼자 집을 보러 왔다. 남편의 직장 동료가 추천한 지역이었다. 매물이 잘 나오지 않는 지역이니 하나라도 나왔을 때 혼자라도 보고 와야 할 상황이었다. 낮에 외부에서 미팅 한 건을 마치고 전철을 탔다.


미팅 때 사용하느라 노트북 가방과 핸드백을 들고 있었다. 티셔츠 속 등줄기를 타고 땀이 조르르 흘렀다. 치마의 허리 부분엔 땀이 찰방거렸다. 가급적 가벼운 것으로 고르고 골랐던 노트북도 어깨를 짓누르고, 노트북 가방의 끈은 어깨에 빨간 자국을 열심히 새기고 있었다.


전철 간격이 먼 낮 시간, 더운 15분을 기다려 전철을 타고 파주로 향했다. 정거장 수를 세어보니 입이 딱 벌어지게 멀었다. 그래도 일단 가보자고 마음먹고 자리에 앉았다. 가는 시간이 길어 잠시 졸았다가, 앉아서 핸드폰을 보고, 창밖의 풍경도 감상했다. 한 시간 반 정도 전철을 타고 가던 중 생각이 났다.

‘오늘은 이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양보 강요를 받지 않았다.’


전철 안을 둘러보니 한 둘의 노인은 있었지만, 젊은 학생이나 내 또래의 사람들만 있었다. 어찌 된 일일까? 전철에서 이렇게 평온하게 오래 앉아 이동한 게 대체 얼마만인가 싶었다.


매물이 있다는 아파트 단지로 들어와 보니 전철에 노인이 적었던 이유가 짐작이 갔다. 이 동네에는 노인이 많지 않았다. 오후 4시경의 햇살이 뜨거운 가운데 어린이집 차에서 내리는 아이들을 데려가는 내 또래의 엄마들이 보였다. 단지 안에는 맑은 인공 개울이 흘렀고, 노인정이 세워져 있었으나 그 주변에 노인이 보이지는 않았다.


간혹 지나가는 사람은 수업을 마친 학생들과 이따금 장바구니를 들고 걷는 주부 정도였다. 이제 막 발전을 시작한 신도시에는 노인이 없었다. 전철을 타고 이 도시에 내릴 노인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생명력이 넘치는 아이들이 뛰놀고, 주로 내 또래의 사람들이 사는 이곳이 좋았다.

물론 늙었다는 이유로 사람을 싫어하는 건 나쁘다. 늙어서 싫다기보다 늙은 사람의 완연한 고집이 싫어서 자꾸 피하게 된다. 어떻게든 내 심정의 핑계다. 나는 아프고 힘들고 약한 사람에게 양보를 하고 싶지, 늙었다는 이유로 맡긴 것을 달라는 식의 강요에 무언가를 내주는 상황을 피하고 싶다.


물론 나도 늙는다. 지금도 늙고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허리가 굽고 병색이 완연한 노인이 될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노인이 된 시대는 지금과 분명 다를 거라고 상상한다. 지금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강요에도 꼭꼭 참고 있다고 생각한다. 훗날 노인이 된 우리들은 서로를 쳐다보는 눈인사로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그때 정말 싫었잖아?’

‘그때 그들처럼 얄밉게 굴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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