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귀리밥 Dec 05. 2017

주인에게

내 주인들과 오래도록 튼튼하게 살고 싶다.


아침에 두 번 알람이 울린다. 웅장한 행진곡 알람은 오전 6시, 피아노 연주곡 알람은 오전 7시 10분이다. 각각 알람의 주인이 다른데, 6시의 알람은 남주인의 것이고, 7시 10분의 알람은 여주인의 것이다.


6시 알람을 누르고 움척거리며 일어나는 남주인은 거실로 나가 전화영어를 한다. 본인이 하겠다고 신청했으면서 몹시 싫은 얼굴이다. 약 10분간 전화영어를 하고 나면 운동기구가 설치된 방에 들어가 운동을 하고 샤워를 한다.


7시 10분의 알람을 누르고 일어나는 여주인이야말로 나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많은 손길을 주고받는 사이다. 피아노 연주곡 알람이 울리면 매일 듣는 소리면서도 깜짝 놀란 것처럼 일어나는 여주인은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비척거리며 온수매트를 끈다. 간밤에 자세가 안 좋았는지, 어깨가 결리는 모양이다. 기지개를 켜고 어깨를 한 손으로 주무르며 거실로 향한다.


거실을 거쳐 옷방으로 간 여주인은 남주인의 옷을 고른다. 한동안 직접 옷을 골라 입도록 했더니 남주인은 기막힐 정도의 패션센스를 선보였다. 감색 바지에 감색 쟈켓, 파란 청바지에 빨간 후드티, 회색 바지에 회색 쟈켓 등등. 그 이후로 여주인은 남주인의 출근 복장을 매일 아침 고른다. 핸드폰으로 날씨를 확인하는 것도 이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는 주방으로 가 물을 한 컵 마시고 아침을 준비한다. 아침식사라고 해도 거창한 메뉴는 없는 것 같다. 주로 과일을 먹거나, 간단한 떡 한 조각 혹은 토스트에 차를 곁들인다. 결혼 직후 반년 정도는 아침에도 밥과 국을 차렸던 것 같은데, 남주인의 요구에 따라 식단을 바꿨다.


샤워를 마치고 준비된 옷을 입은 남주인이 식탁에 앉으면 여주인도 앉아 함께 아침식사를 한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식사의 끝에는 비타민제를 챙겨 먹는다. 남주인이 겉옷을 입고 핸드폰과 이어폰을 주머니에 챙겨 넣으면 현관에 가서 여주인이 골라준 구두를 신는다. 둘은 저녁에 또 만날 거면서 부둥켜안고 배웅을 한다. 그리고 저녁 시간까지 내 안에는 여주인만 남는다.




다른 집 여주인들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아무도 없는 시간에 낮잠도 자고 게으름 좀 부려도 될 법한데, 우리 여주인은 쉬지 않고 뭔가를 한다. 피곤해 보인다.

일단 아침식사를 마친 주방기구의 설거지를 하면서 온 집안의 창문을 열어 환기를 한다. 저녁 내내 달궈 훈훈했던 속내에 찬바람이 꾸역꾸역 들어와 냉랭해지지만, 이렇게 해야 내가 건강해진다는 사실을 나도 알고 있다.


10분 조금 넘게 환기를 마치면 다시 창문을 닫는다. 그리고 내 속을 헤집고 다니며 머리카락을 줍는다. 세탁실에 들어가 빨래의 양을 체크하고, 세탁바구니가 가득 차면 세탁기를 돌린다. 그쯤 돼서야 여주인은 욕실로 들어가 머리를 감고, 간단히 몸단장을 한다.


이쯤 되면 오전 10시가 되는데, 여주인이 서재로 들어와 일을 하는 시간이다. 이메일을 먼저 열어보고 관리하는 채널들을 훑어보는 데만 한 시간쯤 걸린다. 물론 그 중간에 실시간 검색어나 관심 있는 연예인 이름 검색도 한다. 즐겨 찾는 쇼핑몰에서 무료배송 이벤트라도 하는 날엔 부리나케 드나든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업무를 시작한다. 외부에서 원고 청탁을 받아 글을 쓰는 여주인은 이상하게 집중하면 할수록 머리가 거북이처럼 앞으로 나가는 경향이 있다. 입도 화난 사람처럼 부루퉁하게 나온다. 그런 자세로 계속 있으면 건강이 안 좋아질 것 같은데 꿈쩍도 않는다. 한 번 집중해서 쓰기 시작하면 두어 시간쯤 일어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이 사람이 여주인인지, 굳어버린 거북이인지 헷갈린다.


그리고 점심시간이 찾아온다. 혼자 밥을 차려먹는 여주인은 남주인이 있을 때보다 간소하게 식탁을 차린다. 나이가 들며 살이 푹푹 찐다고 구시렁대더니, 요즘은 점심때마다 푸성귀만 먹는다. 저러다 한 번 폭발할 것 같다. 코끼리도 풀만 먹는다던데. 몸집이 채식에 비례하는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점심식사를 마치면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신다. 가끔 말차를 마시기도 한다. 여주인은 일본에서 사 오는 말차를 그리 좋아하는데, 일본 여행을 한 번 다녀올 때마다 보부상처럼 말차를 사 온다. 그 많은 말차 상자를 내 몸 여기저기에 욱여넣는다.


한 시간쯤 차를 마시며 책을 읽다가 다시 서재에 틀어박혀 일을 한다. 이쯤 되면 거북이처럼 일하던 자세가 말썽을 일으키는지, 잠시 거실로 나와 안마기를 목에 건다. 안마하는 동안 여주인 표정이 극락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후 4시경, 조금 늦으면 5시 무렵까지 일을 더 하고 서재를 말끔히 정리한다. 그리고 다시 거실로 나와 위빙을 한다. 위빙은 조그만 베틀에 실을 끼워 직물을 만드는 것인데, 최근 여주인이 취미를 들인 것이다. 그런데 이게 시간도 꽤 걸리고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인 모양이다.


위빙을 하며 여주인은 때때로 “내가 미쳤지, 내가 미쳤어! 내가 이걸 왜 시작해서!”라고 탄식을 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본인이 자진해서 한 거면서 남주인이나 여주인이나 왜들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둑어둑해져 조명을 켜야 할 때가 오면 냉장고를 둘러보며 저녁 메뉴를 짜 보고 재료들을 손질하는 시간이다. 오늘은 뭘 만들려나, 지켜봤더니 소고기 감잣국, 참나물 무침, 떡갈비 구이와 쌈채소, 밑반찬 몇 가지를 준비하는 모양이다. 여주인은 여전히 손이 느려서 반찬 하나 만드는 데 1시간쯤 걸린다. 그래서 남주인이 도착할 무렵엔 얼굴이 빨개지도록 바쁘다.


여하튼 저녁 7시 반경이 되면 남주인이 도착하고, 주인들은 아침에 부둥켜안았던 현관에서 해후한다. 남주인이 옷을 갈아입고 씻고 나오면 얼굴이 새빨개진 여주인이 상차림을 마무리한다. 굉장히 고되 보이지만, 그래도 본인이 좋아서 하는 것 같으니 괜찮다.


밥을 먹고 나면 남주인이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한다. 여주인은 다과를 준비한다. 주인들은 차를 매우 좋아해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차를 마신다. 여주인을 쌉싸름한 맛의 차를 좋아하고, 남주인은 달콤한 차를 좋아한다. 그리고 둘이 동시에 좋아하는 차는 역시 말차다.


결혼 전 여주인이 만들었다는 퀼트 크리스마스 트리.


둘은 차를 마시며 하루 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나누고 깔깔거리고, 가끔 컨디션이 좋으면 영화도 한 편 본다. 그리고 밤 11시가 되면 말없이 각자의 핸드폰으로 뭔가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만화를 보는 것 같다.


둘이 같은 만화를 보는 것 같은데, 그래도 각자 보는 게 편하니까 그런가 한다. 각자 똑같은 만화를 보면서 의견도 주고받는다. 그리고 또 깔깔거린다. 이쯤 되면 남주인이 먼저 칭얼거리며 잠투정을 부린다. 온수매트를 켠 다음 둘은 스탠드를 끄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꿈꿀 준비를 한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며 나는 한 일이 없어 보이지만 나름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비바람을 막고, 여주인이 좋아하는 채광도 만들려고 애쓰고, 내 몸의 근육과 같은 단열재를 활용해 보온을 하고, 주인들이 단란하게 사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 역시 이들과 오래도록 지내고 싶다고 상상한다.


주인들이 늘 좋은 모습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특히 여주인은 늦은 밤 어둑한 내용의 소설을 읽고 하염없이 눈물짓기도 하고, 할머니의 부고를 전해 듣고는 울먹이며 짐을 챙기기도 했다. 남주인이 감기에 걸려 끙끙대는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무력한 존재였다. 그저 주인들이 조금이나마 더 포근하게 지낼 수 있도록 이 자리에서 잘 기다리고, 비바람을 막아주는 것이 나의 최선이다.


나는 나라의 북쪽인 파주시의 한 마을에 존재하고, 이 존재감은 서류에도 명백히 적혀있다. 나는 이 부부의 집이다. 나는 이 부부, 다시 말해 내 주인들과 오래도록 튼튼하게 살고픈 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개운치 않았던 양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