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읽었습니다.

by 귀리밥

젊을 때는 서른 살 넘은 사람들이 모두 중년으로 보이고, 쉰 살을 넘은 이들은 골동품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시간은, 유유히 흘러가면서 우리의 생각이 그리 크게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해준다. 어릴 때는 그렇게도 결정적이고 그렇게도 역겹던 몇 살 되지도 않는 나이차가 점차 풍화되어 간다. 결국 우리는 모두 ‘젊지 않음’이라는 동일한 카테고리로 일괄 통합된다. 내 경우는 그런 문제로 신경 쓰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107.P


독서모임의 지정도서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1부를 읽을 때는 별 감흥이 없었고, 좋아하는 소설이긴 하지만 <상실의 시대>가 떠올랐다. 어딜 가나 있는 와타나베처럼, 어디에나 흔한 재미없는 소년이 성년이 되어 가는 일들 말이다.


그저 좀 재미있는 친구들과 진중한 친구 하나, 제멋대로인 여친구가 등장하고 유난스러운 부모를 짐작하는 정도였다. 이때가지는 2부가 이렇게 내 마음을 후벼 놓을 줄은 몰랐다.


그런데, 왜 우리는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유순해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잘 살았다고 상을 주는 게 인생이란 것의 소관이 아니라고 한다면, 생이 저물어갈 때 우리에게 따뜻하고 기분 좋은 감정을 느끼게 할 의무도 없는 것 아닌가. 생의 진화론적 목적 중에 향수라는 감정이 종사할 만한 부분이 과연 있기나 한 걸까. 144.P


책을 읽다 보면 분명한 암시로써, 암시가 아니어도 작가의 평소 생각이나 살아온 내력을 엿보기에 좋은 단락이 나온다. 여기서 나는 잘 살았다고 상을 주는 것도 아닌 인생을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 지나온 과거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야만 했다. 과거를 어찌 바라봐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향수’라는 게 우리에게 필수품 아닐는지.



예전에 마거릿에게 들은 말인데, 여자는 자신이 가장 매력적이었던 시절의 헤어스타일을 늙어서까지도 고수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과감히 쳐내는 게 두렵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더는 어울리지 않는 스타일에 줄곧 매달리는 것이다. 158.P


내 얘긴 줄 알았다. 그래, 나도 고민이다. 언제까지 뱅 헤어 유지할 수 있을까. 늙었는데.



뇌는 고정 배역을 맡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만사는 감소의 문제요, 뺄셈과 나눗셈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무섭고 뇌가, 기억이 우리의 뒤통수를 칠지도 모른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속 편하게 점진적인 쇠락에 기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꿈 깨시지. 인생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니까. 19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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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쓴 작가가 있고, 작가의 온몸에서 나온 귀한 글귀들이 있다. 나는 이렇게 마음에 드는 글귀들을 어딘가 적어놓기를 좋아하는데 아마 그것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강해서일 거다. 분명 이 멋진 글귀들은 줄리언 반스의 것인데, 이렇게 적어놓기만 해도 내 안에서 새롭게 소화되는 것 같은 체험이다.


어쨌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나이 듦에 대한 복잡한 이야기였다. 기억은 자신만의 것으로 쓰인다. 작가의 멋진 글귀를 내 것으로 소화하고 싶어 적어놓는 나처럼, 결국 지나간 일을 편집하고 소유하는 개인마다 다른 기억이 남을 수밖에 없다. 초반에 왜 그토록 진지하게 역사에 대해 이야기했는지, 그건 정말 중요한 대목이었다.

어떻게 살아왔을까, 그리고 어떻게 살아갈래, 지나간 일은 어떻게 감당할래.

이런 질문이 무수해졌다. 나는 어떻게 기억되는지, 또 어떤 사람인지. 책을 읽던 방에 혼자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갑작스레 창피함을 느끼게 되는 그런 독서.

오래도록 잊지 못할 회한이 내 안에 밀려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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