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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온실 수리 보고서

예술 노마드의 향유 #23 _ 독서노트

by 딸리아

인간의 상상력이란 어디까지 가능한가.

오랜만에 술술 읽히는 소설을 만났다. 작품을 읽는 내내 창경궁 대온실을 검색해보게 되었고, 역사 속 인물들과 공간을 소설로 극화해낸 작가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설은 창경궁 복원 사업 중 ‘대온실의 수리 보고서’를 작성하는 현재의 시점에서 시작한다.

주인공 영두는 이 작업을 맡으며, 어린 시절 창경궁 인근 원서동에서 보냈던 시간과 그 속에서 느낀 이질감, 그리고 약자의 위치에 머물렀던 자기 자신의 기억과 마주한다.

이방인이자 약자였던 시절. 어른들과 맞서기엔 어렸고, 함께 싸워 줄 엄마는 없었으며, 남의 집에 얹혀 살았던 소녀는 세상의 구조와 조용히 충돌하며 굴욕을 감내해야 했다.


중학교 시절, 영두는 강화에서 상경했다.

서울 낙원하숙집에서 일본인 할머니 안문자와 손녀 리사와 함께 살았다. 같은 중학교에 다녔지만, 리사와의 관계는 늘 껄끄러웠다. 미묘한 감정의 경계 속에서 친구로도 적으로도 명확히 규정되지 않았던 두 사람은, 학내 시험지 유출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멀어진다. 보호받지 못한 채 고립된 영두는 하숙집을 떠나고, 주유소에서 알게 된 순신과의 관계도 그 즈음 정리된다.


대온실과 관련된 서사 축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강점기 창경궁 대온실을 설계한 일본인 후쿠다 노부루, 그를 기억하는 시미즈 마리코, 해방 후에도 그 공간을 지킨 박목주와 그의 상사 이창충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전쟁과 권력의 이면, 인간의 잔혹함은 이 인물들의 관계를 통해 드러나며, 그 잔상은 현재까지 이어진다. 일본인 문자 할머니는 박목주의 양녀로 등장하며, 조선에 남은 전후 일본인으로서의 삶과 트라우마, 그리고 잃어버린 동생 유진의 기억을 품고 현재를 살아간다.

현재의 강화에서는 절친 은혜, 은혜의 딸 산아, 그리고 산아의 친구 스미가 등장한다. 영두는 산아와의 관계를 통해, 어린 시절의 자기 자신과 다시 마주한다. 보호받지 못한 아이, 말하지 못했던 아이,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했던 아이. 그에 반해 산아는 문제를 제기하고, 검색하며, 말을 꺼내고, 스스로 보호하려 한다. 소통하며 해결해나간다.


이 소설은 과거와 현재, 창경궁과 강화, 기억과 기록을 교차시키며, 다중적인 서사를 형성한다. 영두를 중심으로 시대와 공간을 넘나드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의 층위를 더한다. 그 속에서 영두는 지난날의 굴욕과 기억을 꺼내고 복원하며 새롭게 재조립된 인생을 살아간다.




1983년 12월 31일에 창경원이 폐쇄되었다.

나는 1978년 5월엔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기억은 흐릿하지만, 사진은 선명하다.

사진 속 마흔도 되지 않았던 엄마는 너무나도 젊고 바르게 서 있다. 그 곁엔 중학생 딸과, 초등학생 딸, 그리고 아직 입학하지 않은 두 명의 딸이 차례로 서 있다.

이제는 그 딸들이 그때의 엄마보다 더 나이를 먹었다. 엄마를 바라보던 아이들은, 엄마보다도 자기 자신의 모습만 눈에 들어왔다. 그러던 딸들도 이제는 사진 속 젊었던 엄마를 바라본다.


사진 속 벚나무는 건강했고, 벚꽃은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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