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캐인 듯 부캐인 듯, 진실인 듯 가장인 듯
때로는 나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을 때가 있다. 나와 익숙한 사람들 속에서 나로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새로운 인물로, 의외의 인물이고 싶다. 때때로 '어머 저런 사람이었어? 전혀 몰랐네' 하는 뻔하지 않은 삶을 꿈꾼다.
의외의 인물이 되어 버리는 순간 만큼은 만나는 사람들도 당연히 달라야 한다. 당연히 다르겠지? 이른바 ANOTHER 클래스의 인물로서 그들을 마주하고 그 세계 사람이 되는 것이다. 가면을 쓴 듯 안 쓴 듯 그렇게 몇 개의 세상을 오가며 삶을 산다는 것, 살 수만 있다면... 그것이 부캐를 갖는 이유가 아닐까.
지금의 나를 잊으시라. 새로운 상황, 환경에 몰입되어 새로운 내가 태어난다. ANOTHER 나로군^^
나에게 익숙한 = 남들이 기대하는 행동에 얽매여 살아가 주는 내가 아니다. 그들의 상식이 나의 일상이 되어 쉽게 살아지는 삶이 아니다.
하지만 또 살다 보면 남들이 기대하는 행동을 하고 부응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살지 않을까. 다시 세상 사람들의 상식 속에서 살게 되는, 그들과 어울려 그 세상 사람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어쨌든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것은 쉬운가부터 살펴보자. 그 새로운 세상에서 과연 원하는 나로 살고 있는지, Another Person 으로 변신하였는지 말이다.
클래식 남성 4인조를 뽑는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한 테너가 비보잉 댄스를 췄다. 점잖은 표정과 묵직한 목소리로 별로 말도 않는 멤버, 팀에서 가장 형님인 그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바닥에 머리를 대고 wind mil 을 한다. 멋지게 윈드밀을 돌고나서는 흩어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가지런하게 펼친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이 정돈되고 다시금 묵직한 테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중학교 시절, 비보이 댄서로 시작하여 맨하탄의 성악가로 자라나 지금은 분당 호두 까페 주인으로 살고 있다. 언젠가 다시 싱어로 돌아갈 날을 꿈꾸며, 경제적 걱정 없이 노래 부르고 살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단다. 오늘도 늦은밤 호두파이 주인은 불꺼진 까페 안에서 노래를 부른다. 연미복의 그이와 까페주인이 서로 겹치며 현실을 마주한다.
배우 윤여정의 아카데미 수상으로 그녀의 인생이 심심찮게 전파를 탄다. 언젠가 미국에서 돌아온 그녀는 쪼글쪼글한 피부와 숱한 주름의 단역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부터인가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의 대명사가 되었고, “못하겠어, 뭘 이런 걸 하라고 해” 궁시렁 대며 해내고야 만다. 노배우의 여유와 세상에 대한 위트가 연일 화제가 되고, 해외시상식에서도 맘대로 영어가 되는 한국배우이다.
젊은 시절, 미국에서 돌아온 이후 자식들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작은 역도 마다하지 않았다. 한때 잘 나가던 여배우가 이혼녀가 됐고, 무일푼으로 한국에 돌아왔고, 당장 돈을 벌어야 했고, 하찮은 배역도 감사했다고 한다. 쌀독에 쌀이 없었던 때가 더 많았다고 한다.
이들의 절실함이 연기력과 노래로 채워진다. 슬며시 대중들에게 다가와 대중들의 품에 안긴다. 누가 뭐래도 성공한 이들이 빛을 발한다. 세상을 향해 제대로 한 방 메겼다.
비보잉 댄서에서 성악가로 까페사장으로 자신의 삶을 산다. 여배우에서 엄마로 조역으로 자신의 삶을 산다. 우리는 계획되지 않은 삶, 내가 알고 있던 나와 다른 인생 상황에 빠진다. 그 순간 깊은 동굴로 들어가 세상을 마주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이내 새로운 출발선에서 세상을 마주한다.
짧을 것 같았던 부캐가 주캐가 되고 다시 부캐가 되고. 주캐든 부캐든 연연하지 않고 그냥 현재를 산다. 이성이 필요한 직업세계와 감성이 필요한 취미세계에서 각각의 캐릭터를 만든다. 책장 한켠에는 논리와 사고 관련 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고, 식탁 위에는 갖가지 그림도구들이 널부러져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그림 그리러 간다. 사람들과 어울려 괜한 거에도 낄낄댄다. 선생님의 관심과 확인을 위해 별로 한 것도 없이 어거는 어때요 한 번씩 해줘야 한다. 그 세계는 마치 초등교실과 같다. 선생님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움직이고, 숙제를 걱정하고 검사 받으며 피드백 받고, 자기들끼리 이러쿵 저러쿵 편을 가르고, 말 한 마디에 상처받고 기분 나빠한다. 수강취소를 하는 일도 벌어진다.
또 다른 세게에 동화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부캐를 갖는 이유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고 실현시키기 위한 것인데, 그 곳에 가서 이전의 나를 고수하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