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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도 외삼촌이 있답니다

외삼촌이란 말이 자연스러워요

by 딸리아

몇 년 전 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친척 중 한 분이 돌아가신 것 이상으로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엄마의 언니가 있다는 것은 알지만 오십 넘게 살면서 내 기억 속에 한 번도 뵌 적이 없다. 울산에 사신다는 것, 한 쪽 다리를 저신다는 것, 이모부는 돌아가신 지 오래라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다.


이모 장례식에는 엄마와 아빠 두 분만 가셨고, 이모의 영면을 기도하면서 혼자 남은 엄마를 걱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발인 전날 밤 아빠가 급히 전화 하셔서는 '니네 엄마가 좀 이상하다'고 하셨다. 장례식장에서 배고프다고 밥도 안 주냐고 하셨단다. 자기 언니의 장례식장에서 배고파한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다.


그렇게 장례식이 끝나고 딸 넷과 사위 셋은 서울역에 엄마 아빠를 모시러 나갔다. 혹시나 엄마의 상태가 안 좋으면 병원으로 바로 가야 하기에 단단히 준비를 했다. 의외로 엄마는 담담하셨고 웬일이냐며 우리를 보고는 좋아하셨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불쑥 “이제 나 밖에 없어”라고 하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이모가 돌아가셨으니 엄마 혼자 남았다. 엄마의 한 마디가 내 마음을 쓸어 내렸다. 우리가 있지만 엄마는 혼자다. 그 이후로 일본에 계시다는 외삼촌 얘기를 자주 하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진을 꺼내 보시며 할아버지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일본에서 어떻게 알고 찾아 와서는 상주 노릇을 다 하고 갔단다.


외삼촌의 존재가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앨범 속 외할머니 곁에 서있는 외삼촌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낯설다. 엄마의 배다른 남동생은 외할머니 아들이 되어 있었지만 엄마는 평생 서너 번 만났을 뿐이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두 번, 아주 잠깐.


엄마가 치매 판정을 받으셨다. 남동생을 계속 찾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외삼촌을 찾기로 마음 먹었다. 아빠는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을 찾아 외할아버지 성함을 대면 금방 찾을 거라 했다. 아니나 다를까 단 번에 찾아졌다. 외삼촌 이름과 치과의사, 여기에 민단을 넣으니 엄마와 비슷하게 생긴 분이 떡 하니 나타났다. 일본으로 전화를 걸었고 '제 외삼촌인 것 같아서 전화한다'며 전화번호를 남겼다. 그날 밤 외삼촌이라는 분이 전화를 주셨고, 당신 열 다섯에 누나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말씀도 하셨다. 카톡을 통해 서로의 사진을 주고 받았다. 그렇지만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2021년 2월, 코로나로 한창 문닫아 걸었던 때이다. 외삼촌은 2020년 8월에 민단 산하 000 회장이 되셨고 그 신문기사 속에 치과 여섯 개를 가지고 있는 재일 한국 기업인으로 외삼촌을 소개하고 있었다.


엄마는 앨범 속 젊은 시절의 외삼촌과 칠십이 넘은 지금의 외삼촌 사진을 들여다 보며 내 동생이 아니라 한다. 우리가 보기에 엄마와 외삼촌은 서로 닮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늙은 사람이 어떻게 내동생이냐며 할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았다며 부정하신다. 그러면서 당신 동생은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 일본에서 나보다 먼저 와서는 일을 다 치러 주고 갔다며 고맙다 하신다. 동생 만나서 밥 사줘야 한다며 언제 일본 갈 수 있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말씀하신다. 코로나가 끝나야 갈 수 있다고 하루에도 몇 번이고 똑 같은 말이 오간다.


외삼촌에 대한 정보는 업데이트된 게 없다. 000 회장이라는 것, 치과병원 여러 개를 운영하신다는 것, 신문에 나와 있는 정보 외에 알고 있는 게 없다. 카톡에다 대고 가족은 어떻게 되세요, 어머님은 살아계세요 묻는 것도 이상하다. 당장 외삼촌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지도 몰라서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다. 우리집 사람들 중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외삼촌에게 살갑게 다가갈 인물이 없기도 하다.


외할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되어 우리집은 방 한 칸에 여섯이 함께 지낼 정도로 어려웠던 때가 있었다. 그 때 외삼촌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오래도록 그 집에서 지냈을 지 누구도 모를 일이다. 기억 속의 외삼촌은 이층집을 사준 정말 좋은 분이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치매는 속도를 내고 있다. 작년 8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용기를 내어 안부인사를 보냈다. 엄마가 아프다는 말은 않고 엄마가 찾는다며 한국에 오실 일 있으면 연락달라고 했다. 며칠 전 에티오피아로 출장 가 있던 내게 뜬금없이 카톡이 날라왔다. 대통령 취임식 참석차 한국에 오신다고, 식사하자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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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엄마와 아빠, 우리 형제들은 외삼촌과 마주했다. 그 와중에 귀국을 했지만 코로나 3차 미접종인 관계로 나는 자가격리되었고 나가지 못했다. 아빠는 외삼촌에 대해서 연하다는 표현을 하셨고 잘 자랐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일본서 한국인으로 살자면 억세야 했을 것으로 생각한 듯 하다.


그날 상황을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아빠와 외삼촌은 술을 주거니 받거니 마셨고, 언니는 번역기 돌려가며 통역, 의사소통을 도왔다고 한다. 우리는 외삼촌에게 벨트와 넥타이를 선물했고, 아빠는 밥을 샀고, 엄마는 동생 용돈으로 오십을 가지고 나가서는 삼십만 줬다고 한다. 외삼촌은 엄마에게 10만엔을 용돈으로 주셨다.


그렇게 기다리던 외삼촌과 엄마가 만났고, 밥 사줘야겠다고 노래를 부르시더니 밥도 사고 용돈도 주셨다. 혹시나 외삼촌 만나 생각지도 않은 행동을 했을까 걱정했는데, 용돈 깎은 거 빼고는 별일 없으셨다. 오늘도 전화를 하셔서는 당신이 동생 용돈을 줬고 동생으로부터 용돈을 받았다는 걸 잊은 채 언제 일본갈 수 있냐고 하신다.


외삼촌이 보이스톡을 주셨다. 약간 얼큰하신 기분 좋은 목소리로 일본말을 섞어가며 고맙다고 하신다. 나는 일본어를 배워야겠다고, 가을에 오시면 집으로 모시겠다고 했다.


외삼촌이 암마는 괜찮냐고 물으신다.

아셨구나!

그날 언니가 엄마 치매라고 일본어 찾아서 알려드렸단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인데, 그래도 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이다.


우리 모두는 외삼촌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나이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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