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일을 할 것인가
사전적 의미의 탐욕은 '지나치게 탐하거나 누리고자 하는 마음'이고, 단테는 “자신이 필요한 것보다 더 소유하려는 욕구”를 탐욕이라 했다.
정년을 훌쩍 넘긴 이들이 00협회를 만들고 00전문가가 되어 여전히 일하고 있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살아있는 자신을 자랑스럽게 드러낸다. 그 정도 했으면 됐지 왜 저리 욕심이 많아 하며 애써서 일하는 그들을 탐욕적인 인간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저 나이에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다짐하기도 했던 그들이 그 나이가 되었을 때 이른바 탐욕적인 인간이 되어 있다.
그런데 탐욕의 ‘지나치게’ 또는 ‘필요한 것보다 더’를 가늠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어느 정도를 ‘지나치다’, ‘필요한 것보다 더하다’고 하고, 탐욕적인 인간이니 마니 할 수 있는 것일까.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이나 성희롱∙성폭력의 자치단체장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들의 탐욕을 결정짓는 기준으로 도덕과 윤리를 생각해볼 수 있다. 지나침과 더 소유하려는 욕구를 위해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사회가 정한 법, 제도 등 사회규범을 거스르면서까지 누리려고 했던 그 마음과 행동. 이러한 것은 바로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지탄을 받고 범죄로 다스려져 탐욕이라 칭하기에 수월하다.
그런데 도덕과 윤리적 잣대가 아니라 자신이 필요하다고 여겨 탐한 행동에 대해 제3자들이 지나치다는 둥, 과하다는 둥 판단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들의 행동이 탐욕스런 것일까, 그들의 행동을 탐욕으로 치부하는 것일까, 그들의 탐욕을 우리가 저울질 할 수 있는가.
얼마 전 만난 73세 몰타 할아버지는 51년 동안 외국어학교에서 근무를 했고 앞으로도 그의 말로는 죽을 때까지 교장직을 내려놓지 않겠다고 했다. 69세 네덜란드 할머니는 스페인으로 어학연수 와서 매주 보는 레벨테스트를 못 봤다고 울음을 터뜨렸다. 맥도널드 창업자는 몇 살에 일을 그만 두었던가? 우리나라 00기업 회장이 70세에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것에 대해 언론의 찬사를 생각하면 물러날 때를 모르고 현직에 있다는 것이다. 미국 바이든은 80세가 넘어 대통령이 되었고, 우리나라 김대중 전대통령 역시 74세의 나이에 당선되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여전히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을 끊임없이 증명하며 살아간다. 살아 있는 동안 존재하는 동안 회장으로 대통령으로 교장으로, 조직을 만들어가면서까지 사회∙경제적 역할과 자신의 위치를 명함에 담아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고 믿는다.
당사자들이 아닌 우리는 어떤가. 그들을 바라보며 ‘굳이 저렇게까지 해야 할까, 이제 그만 내려와도 되지 않을까, 젊은 사람들에게 넘겨줄 때가 되지 않았나’ 하며 끝도 없는 그들의 욕심에,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욕심을 안타까워한다.
그들은 젊어서도 ‘자신은 열심히 살고 있어요’를 애써 내보이며 살았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홀가분한 주위를 돌아보며 살아남은 자신을 역시나 기특해 하며 ‘나는 여전히 건재해요’를 애써 보여주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자신들이 그 나이에도 권력과 명예와 지위에 목숨을 걸거라 생각했을까, 언젠가 모든 걸 내려놓고 살아 갈거라 생각했을까. 자신의 목적(욕심, 욕망)을 끝끝내 이루리라 하며 그것이 지금을 살고 있는 이유가 되어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찌 되었든 그런 그들을 향해 ‘이런 탐욕스런 인간 같으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평생을 열심히 자기목적을 향해 살아온 자들에게 ‘이제 고만 하세요’, ‘충분히 할 만큼 하셨잖아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말이다.
인간이 나이가 들면 신체 기능들이 하나 둘 엇나간다. 의도치 않게 말이 나온다거나 남에게 하는 말과 나의 행동이 다르다. 무엇보다 아는 것이 확실하지 않다. 알고 있던 것도 까먹는 판에 새로운 정보가 밀려들고 있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간조차 가늠하기 어려워진다. 50대가 이 지경인데, 60대 70대는 더 하지 않을까? 신체∙정신적 기능의 쇠퇴를 겪고 있으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아닐지 자기 판단이 필요하다. 어느 정도 나이 들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해서 과감히 접을 줄 알아야 한다.
조직은 어떤가. 나이 차가 나는 데도 같은 직급, 위치라고 젊은 사람들과 같은 성과를 기대하는 것이 옳은가. 능력주의 사회라고 같은 성과를 바란다는 것이 공정한 조직인가, 같은 성과를 바라지 않는다고 조직이 삐걱댈까?
나이와 능력 간의 상관관계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차이를 존중한다면 젊은 사람에게는 ‘개발’의 관점에서 고성과를 기대하며 지원하고, 나이가 있거나 역량이 떨어지는 이들에게는 그 보다 낮은 수준_성과달성에는 하자가 없을 정도의 수준_을 기대해야 하지 않을까. 기능적으로 조직화를 이루는 것이 조직의 역할이 아닐까.
역량이 떨어짐에도 조직에 남으려 안간힘을 쓰는 이들을 불쌍하지만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볼 것이 아니라 이들을 위하여 또 다른 트랙을 만들어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구성원 존중’의 참된 행동이 아닐까 싶다.
마찬가지로 정년을 훌쩍 넘겼음에도 역할을 하려 애쓰는 이들을 탐욕적인 인간으로 볼 것이 아니라 사회를 위하여 조직이 할 수 없는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환원하고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으며 사는 이들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의 신체∙정신∙사회적 쇠퇴함을 인정하고 그러한 자신이 도움이 되는지, 같은 선 상의 젊은이들과 경쟁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들과 다른 그들보다 더한 가치를 주고 있는지, 나의 과한 소유욕을 채우기 위해 행동하는 것은 아닌지 판단해야 할 것이다. 아니라면 나 스스로 나의 애씀이나 나의 안간힘을 탐욕이라 규정지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