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다시 만나다

독서, 배움의 지속

by 김진심

네 개의 모서리가 있는 네모반듯하게 생긴 너, 겉은 빳빳하지만 속은 그 보다 얇은 종이로 가득 차 있는 너, 종이에 그림이나 사진이 있기도 하며 검은색 글씨가 잔뜩 쓰여 있는 너. 그런 너에게 나는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너는 그냥 네모난 책이었다.


학교를 가기 전 날, 수업시간표에 맞춰서 맞는 책을 가방 속에 넣었다. 학교 수업시간에는 언제나 책을 펼쳤고 선생님이 중요하다는 부분에는 색연필로 밑줄 긋고 필기를 했다. 책을 바꾸어가며 수업을 듣고, 방과 후에는 다시 그것들을 넣은 무거워진 가방을 메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수업에 필요한 책으로 다시 바꿔 가방 정리를 하면 끝이 아니고, 학원에 가서 책을 또 펼쳐야 했다. 그리고 시험기간에는 네모난 책에 치여 살았다.


책=공부, 그때는 학교 공부에 필요한 책만 넘겼으니 교과서 아닌 다른 책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중학생 때 잠시 만화책을 보며 킥킥거렸던 일은 있었지만 거기까지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교과서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나는 책을 다시 만나게 된다.




나에게는 오빠 한 명이 있다. 오빠는 일찌감치 사회생활을 하게 되어서 한 달에 한 번, 월급날이 되면 내게 용돈처럼 도서상품권을 주었다. 또렷한 기억은 아니지만 그즈음부터 큰 서점을 다녔던 것 같다. 주로 종로에 있는 반디앤루니스, 영풍문고를 가거나 건대입구에 있는 반디앤루니스를 다녔다. 이십 대 중반부터는 한 달에 한 권, 나에게 책을 선물해 주었다. 책 한 권을 구입하고 나면 한 페이지만 넘겨서 컬러가 들어간 종이에 날짜를 쓰고 그 해에 몇 번째 선물인지를 적었다.


서점구경을 하며 수많은 책을 다 볼 수는 없지만 제목과 겉표지를 보고 손에 쥐어지는 책을 들어서 책장을 넘겨본다. 일단 종이 냄새를 맡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그 공간 속에 있으면 넓은 세계에 들어온 것 같아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선물하는 날 뿐만 아니라 그 밖에도 지인과의 약속시간 전이나 틈나는 시간에 근처 책방이 있으면 언제든 책구경을 하러 갔다.


많은 양의 책은 아니지만 책꽂이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러나 끝없이 채우지는 못했다. 책선물은 오래도록 지속되지 않았지만 책과 서점은 내 인생 한편에 머물게 되었다. 결혼하면서 책도 함께 이사를 왔고, 볕이 잘 드는 거실에 책장을 두고 나의 책들을 보기 좋게 정리했다. 어쩌다 생각나면 꺼내봤고 평상시에는 제자리에만 있는 책의 존재를 잊으며 지내기도 했다. 대신 아이들의 것을 펼쳐서 같이 책 놀이하는 시간을 보냈다.


몸도 마음도 지쳐가는 시기, 미니멀한 삶을 꿈꾸며 나의 책들을 캐리어에 열심히 담았다. 색이 바랜 책표지는 세월의 흔적을 말해주는 듯 아쉬운 마음도 들어간 가방을 들고 알라딘 중고서점이 있는 종로 3가로 향했다. 책을 팔고 오랜만에 서점 안을 둘러보았다. 내가 가져온 책들처럼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책들은 또 다른 주인이 오기만을 기다린다.




간직하고 싶은 책만 소량 남겨두었다. 이것도 욕심이겠지. 백 퍼센트 비움은 쉽지 않기에 언젠가 남아있는 책들과도 안녕하는 날이 오겠지? 더 이상의 책 구입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언제든지 들를 수 있는 도서관에 다니기 시작했다. 내게 도서관은 시험공부를 하기 위한 곳이었지만 이제는 책 냄새를 맡고 책도 읽을 수 있는 나의 아지트가 되었다.


도서관에 가면 신간코너에 발걸음을 멈춘다. 요즘 어떤 책들이 있는지 구경하고 미니멀, 환경, 육아, 베이킹, 자기 계발, 에세이, 반려동물 관련 코너로 걸음을 옮겨간다. 책제목, 작가소개, 글 목차, 들어가는 말을 훑어보고 잡히는 책을 빌려간다. 한 동안은 나의 관심사 코너에만 머물며 책을 골랐는데, 다른 코너의 책도 쉬엄쉬엄 보면서 철학책도, 경제 책도, 스님의 말씀 책도, 텃밭 책도, 커피 책에도 시선이 갔다.


손에 닿는 책들의 범위가 넓어지게 되니 깊지는 않아도 새로운 이야기를 알게 되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내 머릿속 생각들이 확장되어 넓은 세상을 만나는 순간들이 기뻤다. 책 한 권은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어야 하고, 한 달에 몇 권 이상은 읽어야 하고, 여러 기준을 정해놓았다면 즐겁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읽는다. 틈나는 시간이 생기면 읽고, 시간에 구애 없이 진득하게 앉아서도 읽고, 빌려온 책을 반납하고 새로운 책을 가져와서 또 읽는다. 그리고 기록한다. 마음에 와닿는 부분은 짧게라도 필사를 하거나 핸드폰 메모장에 책제목과 작가를 적어두기도 한다. 사실 그리 대단한 건 없다.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더 나은 내가 위해 조금씩이라도 ‘독서’를 하고 있는 것뿐이다. 평소처럼 지내는 하루 중, 책을 만나는 시간이 계속되길 바라며.

식탁공간.jpg 고마운 만능테이블에서 글쓰기와 독서를 한다.
책선물.jpg 나에게 책선물을 했던 그 시간들은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전 15화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