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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디너리페이퍼 May 12. 2024

[오늘의탐색] 깜빡이의 쓸모

어렸을 적, 

나이가 한 살 터울로 쪼로록 붙어 있던 또래의 사촌들은 

매 년 여름방학이면 어른들 휴가를 맞춰서, 명절이면 연휴 내내 시골 할머니댁에 모였다. 

산도 있는 바다 마을 할머니댁은 아이들이 놀고먹기에 최적의 곳이었다. 

부모들이나 나이 터울 많이 나는 사촌 형제 중 한 명이 신경을 써야 했겠지만, 아이들은 모여 있으면 자기들끼리 놀기 마련이니까. 

한 번은 며칠 이어진 놀이가 끝나고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참 신기한 걸 보았다. 

이 집 저 집 나누어 타고 앞뒤로 잘 달리던 차가 말도 없이 차례대로 갓길에 멈춰서는 거다. 

앞 차가 먼저 갓길로 빠지는 거라면 앞 차 보고 따라가는 거라고 이해하겠는데,

뒷 차가 먼저 갓길로 빠지는 걸 앞 차는 금세 알아차리고 역시 갓길에 세운다. 한두 번도 아니고. 

어린 내 눈에는 너무너무 신기해서 물어봤는데, 어른들 만의 텔레파시라고 했었다. 

좀 더 커서 알게 되었다.

차에 있는 깜빡이 때문이라는 것을. 


작은 골목에서든, 횡단보도에서든 신호등이 있든 없든 언제나 보행자 우선이었던 이탈리아에서 차를 타고 놀라웠는데, 시내 도로에서도, 고속도로에서도 깜빡이를 켜는 차가 없다는 걸 인지했기 때문이다.(여행 중 깜빡이 켜는 차를 두어 번 봤나...)  

반대로, 깜빡이를 절대 켜지 않는 (내가 생각할 때는 끝장) 무매너의 운전자들이 골목길과 횡단보도에서는 보행자 우선을 준수할 만큼 신사적이다. 

여행 내내 궁금하던 차에, 역시나 깜빡이를 켜지 않는 가이드 분에게 이곳 사람들은 왜 깜빡이를 안 켜냐고 물었는데, 아... 글쎄요... 라셨는데 깜빡이를 켜지 않는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계신 듯했다. 모두에게 그게 너무 자연스러운 거지. 

그저 별다른 표시 없이 들어오면 들어오나 보다, 나가면 나가나 보다... 지레짐작, 알아서 파악 그리고 조심. 그나마 서로 대충 눈치 보면서, 상대방도 눈치 볼 수 있도록 서서히 들고 나면 다행이다. 사고가 나지 않으면 깜빡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깜빡이의 존재는 분명한 필요가 있고, 대부분의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믿는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잠시만, 속도 줄여, 먼저 가...  

앞뒤 양 쪽에 하나씩 달려 있는 등을 한두 번 깜박거리는 것만으로도 운전자들은 많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운전면허를 가질 수 있는 나이가 되어 면허를 따고, 운전을 할 수 있게 되면서 깜빡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사용할 때보다 사용하지 않을 때 더 중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 좀 이상하지만 말이다. 운전을 할 때뿐만 아니라 그저 탑승자가 되어 차에 타고 있을 때에도. 


비단, 차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과 사람 간에도 깜빡이가 존재한다. 

그런데 깜빡이 없이 훅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좋다고 덤비는 것도 무신호 직진이면 멈칫거려지기 마련인데,

서로의 역사는 고사하고 사연 하나 없는 사이에서 신호 없이 치고 들어오면 참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난감한 건 차라리 나은 감정이다. 

당황스럽거나 황당스러운 상황이 더 난제다. 

그들은 어쩌다 그런 무매너 직진형 인간이 되었는가,

아니면 그런 사전 신호 따위 불필요해 서로 눈치껏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도 아니라면 그 정도 무시해도 괜찮을만한 관계가 이미 형성되었다고 믿는 건가. 일방적으로.  


사람에게는 차보다 많은 수단이 존재한다. 눈짓, 말짓, 몸짓 그 어떠한 것으로든 가능하다.  

눈을 예쁘게 떠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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