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디너리페이퍼 May 05. 2024

[숏트립] 거북이처럼, 토끼처럼 걷기

걷기 프로젝트 1- 한강 따라 동쪽으로

시작은, 뭐였더라... 

저층에서 고층으로 집을 옮긴 후 한강뷰가 되었다. 

손톱만큼도 아니고, 저~~~~기 멀리 실눈을 뜨고 집중해서 보면 딱 깎아내야 할 새끼손톱만큼의 한강뷰.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이들처럼 여유 있게, 또는 철저하게 자기 관리하는 사람처럼 한강변을 걷고 싶었다. 

아니, 나를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죄책감과 운동으로 건강을 꾸려야겠다는 의지가 자리를 다투며 불끈거리는 연말연초였나. 

그것도 아니면, 허리 통증으로 바르게 걷기를 추천받은 때문인가. 

뭐 딱히 단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가 떠오르지는 않지만, 그렇게 걷기 시작했다. 

물론 자주는 아니고, 작심 1주 정도?

대신 작심을 조금 반복하는 수준으로. 


쉬는 날 아침 한강변을 따라, 

퇴근길에 사무실에서부터 집까지, 

가끔 일부러 약속을 잡고 걷는다.  

물론 아주 드물게 타당하고, 대부분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걷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다.  

계절에 따라,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아무 생각 없이 다리를 움직이는 데만 집중하면 정신이 비워지기도 하고,

운동으로 열량을 소모했다는 생각에 스스로 칭찬하게 되고,

추우면 추운 대로 더우면 더운 대로 몸이 데워지는 걸 느끼면 새삼 생명력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주변을 통해 시간의 변화를 깨닫게 되어 뿌듯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반복되는 경로에 싫증이 나고, 걷기에 소원해지고, 그러다 보니 작심만으로는 움직임이 어려워졌다.

마침, 퇴사로 시간도 많겠다, 나만의 과제를 설정했다. 

"걷던 구역을 넘어 한강 따라 동쪽으로 가보자."

마음을 먹었으니 실천은 곧바로! 


버스를 타고 한 지점으로 가서 동쪽으로 걷기 시작, 멈추는 지점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귀가.

다음에는 지난번 멈췄던 지점으로 다시 버스를 타고 가서 동쪽으로 걷기 시작, 멈추는 지점에서 지하철을 타고 귀가.

이런 방식으로 나갈 때마다 걷고 싶은 만큼 걷다 보니, 어느새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에 접어들고,

구리, 남양주, 팔당, 두물머리를 지나 양평에 도착했다. 

그리고 4월, 양평을 마지막으로 동쪽으로의 여행을 끝냈다. 

사실, 처음 목표를 세우던 마음 같아서는 한강 수원지까지 가보겠어! 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으나

한 발 한 발 멀어져서 성취감이 드는 것과는 별개로

집에서 시작점까지, 중간 종착점에서 다시 집까지 시외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시간이 상당하다.

마지막에 양평역은 편도만 2시간인 데다, 경의중앙선이 중간에 다른 열차를 먼저 보낸다며 정차를 하다 보니 2시간을 훌쩍 넘긴다. 아예 숙소를 잡고 며칠 시간을 들여야 하나 싶은 정도. 


그렇게 홀로 시작한 걷기 프로젝트 1차를 마무리했다.

운동인지, 산책인지, 여행인지 경계가 모호하지만,  

낯선 길을 걷고, 몰랐던 풍경을 보며 몸과 마음을 살피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진행 중 변화가 하나 생겼다.

그동안 항상 혼자 걸었는데, 중간부터 친구와 함께 걷기 시작했다.

한두 번 일거라 생각했던 동행은 마무리되는 날까지 계속되었다.

혼자 걸으면, 컨디션과 날씨, 공기에 기분까지 맞아떨어질 때 갑자기 휘릭 나가는 것과 달리 누군가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기온과 날씨를 참고해 미리 계획을 해야 하고, 그날은 귀찮아도 약속이니 나가야 하며, 유난히 공기가 안 좋으면 취소를 해도 되는지, 그대로 진행할 것인지 머뭇거려야 했다. 

개인의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소소하고 작지만 사회적 맥락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하는 거다. 

혼자 걸으면 생각을 지우고, 적당히 빠른 템포의 음악을 들으며 걷는 속도에 보다 집중한다. 

반면 같이 걸으니 속도는 조금 줄지만,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며 주변을 감각하는 게 더 많아지고 더 오래, 더 많이 나아갈 수 있었다. 

지나간 길들을 생각해 보면, 혼자였다면 정말 양평까지는 갈 수 있었나... 싶다. 


마지막 구간 종착점에서 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보니, 갈 때는 몰랐는데 그동안 걸어간 길이 새삼 길다는 걸 깨닫고는 누가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해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뿌듯함이 증폭된다. 

다음은, 다시 몸과 마음이 동하는 때가 오면. 


덧. 어딜 가도 잘 만들어져 있는 자전거길 때문에 자전거여행에 대한 로망 확인 

덧. 철저하게 그 계절, 그날, 개인의 감상으로 한정된 구간별 기록

(12월) 집에서 한강대교까지, 7.08km

연말이고 시간도 있으니, 걷기를 다시 시작해 볼까. 다리가 시리다. 


(12월) 한강대교에서 잠수대교 남단까지, 5.96km

잠수대교, 걷거나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많은 다리 중 하나이지만 평일이라 한적하다

어디선가 공사를 하는 소음 때문에 할 수 없이 일찍 일어났다. 출퇴근할 때는 조용하기만 한 줄 알았던 곳에 사람 사는 소리가 있다는 걸 알았다. 공기도 안 좋고, 컨디션도 난조인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나가 가볍게, 천천히 걸었다. 

오늘은 새로운 곳까지 갔다가 버스를 타고 돌아왔는데, 여러모로 코스가 별로였다.

날이 흐리면 도심에서 몽땅 사라져 이 수많은 개체들은 도대체 어디 있는가, 의문이 들었던 비둘기 떼는

모조리 한강변 덤불 속 여기저기 무리 지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생명체인 그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에게는 정말 공.포. 그 자체.



(12월) 잠수대교 남단에서 응봉역까지, 6.45km

서울의 대부분은 한강을 따라 자전거 도로와 도보가 널찍하니 정비가 잘 되어 있어 오가기 좋지만, 취향상 잠수대교를 중심으로 양쪽 구간은 그다지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오늘은 여러모로 난관이 있었는데,

고개를 들면 열 지어 햇볕 쬐는 실사 비둘기 떼가,

고개를 숙이면 날아다니는 그림자 비둘기 떼가 공포감을 준다.

게다가 도로 또는 고가도로 바로 아래를 걸어야 해서 꽤나 시끄럽다. 

막판에 갑자기 한강이 줄어들어 말도 안 되게 벌써 끝났나 싶었는데, 건너야 할 다리를 하나 안 건너 예상치 못한 곳, 응봉역에서 짧게 마무리했다. 


(1월) 응봉역에서 강변역까지, 8.92km

공기가 안 좋아 강 건너 시야가 아쉽지만, 서울의 스카이라인은 나름의 매력이 있다 

여행 후, 날씨도 따뜻해진 김에 다시 걸었다.

지난번에 점찍었던 응봉역에서 시작, 동쪽 방향으로. 중간에 이른 점심으로 한강라면을 즐기는 호사까지 누렸다. 

비둘기도 거의 없었고, 

뚝섬유원지도 처음 지하철이나 차에서가 아닌 같은 고도의 지면에서 구경하고, 

지금까지의 구간보다 물에 상당히 가까운 길도 있고, 

여러모로 괜찮았다. 거의 마무리할 지점에서는 물이 조금 깨끗해지는 것 같은 건 나만의 느낌적 느낌?


그동안은 항상 혼자 걸었는데, 처음으로 친구와 함께 걸었다. 조금 천천히, 조금 더 구경하며 걸은 것 같다. 끝난 후에는 커피 한 잔까지. 혼자 걷는 것도 좋지만, 친구랑 같이 걷는 것도 좋네. 

속도를 줄이니 주변에 더 많은 시선이 간다


(2월) 강변역에서 남양주시 수석한강공원까지, 10.55km

걷다 보니 갑자기 서울이 잘 가라 하고, 구리가 손을 내민다. 드디어 서울을 벗어났다!

사람도 별로 아니 거의 없고, 화장실도 거의 없다.

오늘은 날도 좋고, 공기도 맑아 걷기 정말 좋은 날이었다.

그간 누적된 데이터를 보니 9km가 넘어서면 다리가 조금 묵직해진다. 그러면 멈춰야 할 때.

좋은 날, 처음 서울과 안녕~(굿 바이)하고, 구리와 안녕!(Hello) 했다. 믿을 수 없는 곳에서 낚싯대를 드리운 분들이 있다


(4월) 남양주시 수석한강공원에서 팔당역까지, 11.01km

여행 후, 귀차니즘에 빠져 있다가 다시 시작했다. 

주변은 한적하다가 아파트단지가 등장하길 반복하고, 강 건너 아파트들도 끊임없이 이어진다.  

공기는 안 좋았지만, 걷는 기분은 상쾌하고, 말로만 듣던 동네를 지나친다. 

어제 먹은 몽쉘통통 3개는 태웠다. 

여전히 잘 조성되어 있는 산책로. 강 건너 뷰가 서울과 확연히 달라 여백의 미가 있다


(4월) 팔당역에서 양수역까지, 13.88km

날씨도 그렇거니와 그동안까지 중 최고의, 완벽한 코스!

길이가 길어 다소 무리였지만, 다행히 중간에 나타난 음식점에서 저녁식사를 하고 끝까지 이동했다.

잘 정돈된 자전거길과 도보길, 중간중간 등장하는 터널의 시원함, 팔당댐과 그 이후의 많은 것들이 아름다웠다. 

워낙에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더니, 예쁜 주변과 함께 음식점과 카페가 모여 있기도 하고, 지금은 폐역이 된 능내역, 정약용 유적지뿐만 아니라 다산 선생과 관련된 이름이 중간중간 보인다.

체력만 된다면 마지막 코스에서 두물머리 아래까지도 가보고 싶었지만, 패스. 꼭 다시 걷고 싶은 구간. 

자동차 도로와 시원한 물을 옆으로 두고 걷는 길에는 중간중간 벤치가 있어 쉬어갈 수 있다. 전망 좋은 곳에는 카페가 없을 수 없지
지금은 폐역이 된 자그마한 능내역 / 드디어 두물머리(양수리)다
원길산 역에서 두물머리로 건너가는 다리. 왼쪽에는 열차가 다니는 철교가 오른쪽에는 차량이 다니는 대교 말고 소교(?)가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4월) 양수역에서 국수역까지, 10.92km

자전거 도로 옆 도보길을 따라 걷는데, 이 구간은 도보를 위한 길이 조성되어 있지 않은 곳이 많다. 있어도 너무 좁거나. 아무래도 걷는 사람이 적기 때문인 것 같은데, 그래서 걷는 게 다소 위험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든다. 

하지만, 자전거종주길은 어딜 가도 길도 잘 다져져 있고, 안내 표지판도 잘 되어 있어 나갈 때마다 자전거 여행을 해보고 싶은 마음에 불씨를 댕긴다. 


오전시간인지라 높아지는 해를 안고 가는 것도 뜨거웠지만, 더 큰 난관은 가는 길 내내 둥둥 떠다니는 새까맣고 커다란 날벌레였다. 계절적 요인 때문인지 보다 숲과 들판에 길이기 때문인지 잘 모르겠는데, 두 팔을 있는 힘껏  휘저으며 헤치고 가는 길이 너무 무섭고, 힘들었다. 더위에도 마스크 필수.

무조건, 가능한 한 빨리 끝내기를 목표로 걷고, 또 걸었다. 볼 것도, 안전도 걷기엔 다소 어려운 코스였다. 


(4월) 양평역에서 경기옛길 제6길 따라 8.53km

안전과 걷는 즐거움을 고려해 융통성을 발휘, 다소 아쉽지만 국수-오빈역을 건너뛰고 양평역에서 시작했는데, 물과 나무를 따라 난 길이 걷기에 참 좋았다. 

초반 도로를 따라 다양한 풀꽃들이 가득 심어져 있는데, 몇 송이 핀 꽃 만으로도 예쁜데 이들이 다 피면 정말 화려하고 예쁠 것 같다.

산책로 중심의 공원, 꽃나무 중심의 구간, 단정한 나무가 그림자를 드리워주는 구간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나 분명히 관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구간, 마당 있는 예쁜 집들이 있는 구간 등 나아가며 계속해서 변화하는 주변을 보는 재미가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오늘의탐색] 어머니라 불리운 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