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거나 나쁘거나
유쾌하지 않은 두 번의 사건
하나,
나폴리행 고속도로를 달려 톨게이트만 통과하면 끝이다.
카드를 태그 했는데, 아무런 반응이 없다. 톨게이트의 차단봉은 우리가 들어설 때부터 열려 있었다.
가도 되는지 아닌지 머뭇거리며 통화 버튼을 누르고 어쩌지를 못하고 있으니, 두세 칸 옆에서 누군가 달려온다.
결제 여부를 모르겠다 하니, 20유로 현금을 내고 가라 한다. 미리 검색해 알고 있던 딱 20유로.
부스 대신 있는 머신(오~ 자동화)의 스피커에서는 뭐라 뭐라 이탈리아어가 쏟아진다. 우리에게 달려온 이가 뭐라 뭐라 이탈리아어로 대꾸한다. 대화는 계속된다. 그 와중에 둘의 입장이 뭔가 다르다는 게 살짝 느껴진다.
태그 한 카드는 결제가 안된 걸까, 고민한다.
이런, 뒤에는 차가 기다리고 서 있다. 마음이 급하다. 이미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나의 시간이 아니라 뒷 차의 시간을.
기계(속 사람)와 옆에 서 있는 사람은 내가 지갑에서 20유로를 꺼내는 짧은 사이 계속해서 세상 빠른 속도의 이탈리아어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지폐 20유로는 건네는 순간, 스피커는 말한다. 아득하지만 명확하게.
no cash! NO CASH!!
그제야 그 사람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이미 돈을 건네받은, 하지만 빼앗지는 않은 그 사람은 우리에게 다가올 때처럼 빠르게 빠져나가 어느새 멀리 떨어진 그의 동료들에게 돌아갔다.
당장 내 돈 내놓으라고, 경찰에 신고할 거라고 소리쳤지만, 속절없다.
그들도 알고 있는 거다.
우리 같은 덜떨어진 관광객들이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왜 복장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그 사람을 직원이라 생각한 걸까,
왜 사전에 숙지한 톨게이트 카드 결제 방법과 절차는 그 순간 떠오르지 않았던 걸까,
왜 하필이면 차단봉이 올라가 있는 아마도 고장 난 게이트로 들어선 걸까,
왜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비로소 기계 속 사람은 노 캐시를 영어로 말한 걸까.
톨게이트를 지나치며 분에 못 이겨 돌아보니 결제를 하면 열려야 하는 차단봉은 모든 차선 일제히 열린 채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날강도 같은 그들은 꽤나 적절한 간격으로 자리 잡고 서서 우리를(또는 우리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보들 얼른 가란 거겠지.
소름 끼치게 나쁜 놈들. 나폴리에 악영향을 미치는 놈들. 먹고 떨어져라!
덧. 여행 중 렌터카의 경우 하이패스가 장착되어 있지 않은 차량이 대부분이므로 고속도로에서 카드 결제하는 차선으로 가면 된다. 우리나라와 같이 안내가 되어 있고, 현지에서 사용하는 우리나라 신용카드로 결제가 가능하다(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토스카드와 솔트래블 카드를 사용했음).
진입할 때 티켓을 뽑는 경우가 있는데, 티켓을 뽑으면 고속도로를 빠져나갈 때 티켓을 머신에 넣고 해당되는 금액을 카드로 결제한다. 진입 시 티켓을 뽑지 않는 경우에는 그냥 고속도로를 빠져나갈 때 정해진 금액을 카드 결제하면 된다. 부디 나와 같은 일이 생기지 않기를.
그렇게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차를 반납하고, 기차역에 이르는 짧은 길이 유일하게 이탈리아 땅에서 공포를 느낀 순간이었다.
나폴리는 대도시답게 사람과 차(오토바이와 자전거도)가 많고, 도로도 넓다. 그런데 그 혼란스러움이 다른 도시들과 달리 독보적이다. 넓은 도로를 가득 메운 차와 오토바이는, 차선과 상관없이 그저 빈 틈을 찾아 머리만 들이밀면 내 길이 되고, 온 차체를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스치듯 지나가는 와중에 오토바이들은 모래가 자갈 빈틈을 채우듯 끼어든다. 마치 코 아니라 엉덩이를 베어갈 듯이 달려드는 그 어느 차에게도 미리 신호를 주는 깜빡이 따위를 기대하는 것은 사치다. 인간의 탈 것들은 그렇게 헝클어진 채 빵빵거리고, 빽빽거린다. 상상해 보라. 온갖 탈 것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클랙슨 소리와 그걸 간간히 뚫고 나오는 사람들의 높은 목소리가 묵직한 미세먼지가 땅 가까이 내려앉은 것처럼 도로와 역 앞의 모든 곳을 뒤덮고 있다. 클랙슨 소리를 나폴리에 와서 처음,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무수히 들었는데 그 이후를 포함해도 로마에서 딱 1번 더 들었을 뿐이다.
나열하고 싶지 않을 만큼의 혼돈 그 자체.
친구에게는 현금 밖에 안된다고 얘기했다던, 카드 결제 가능하냐며 재차 확인하는 나에게는 카드 가능하다고 얘기했던 신뢰가지 않는 택시 기사는 역 앞에 우리를 내려줄 때 세상 친근한 표정을 지으며 흥정을 시도했다.
물론 주지 않아도 괜찮지만, 내 서비스에 대한 팁을 더 준다면 정말 고마울 거 같아. 어때?
여전히 톨게이트와 도로의 악몽 속에 있던 나는 못되게 말했다.
나는 이 택시값이 당신 서비스에 대한 비용을 포함하고도 남는 금액이라고 생각해.
그는 참 쿨했다. 오케이. 괜찮아.
그걸로 끝.
이동 시간의 변수를 고려해 넉넉하게 잡아둔 기차는 다행히 비용을 조금 더 지불하면 앞 시간 기차로 당길 수 있었고, 우리는 기꺼이 비용을 지불했다.
드디어, 이곳을 떠난다!
둘,
돌로미티를 위해 찾은 베니스는 어제까지 모든 게 좋았다.
점심 나절 밀라노행 기차를 예약해 두어 여유 있게 숙소를 나섰다. 기차역에 사람이 참 많다. 아무리 베니스라 해도 본 섬이 아닌데 이렇게 많을 일인가... 플랫폼 안내 전이라 잠깐 바깥바람을 쐬고 다시 들어갔는데 기.차.취.소. 앞도 뒤도 모.두.취.소. 그리고 멍하니 전광판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이 계속 누적된다.
기차 회사 서비스 코너에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린다. 여기저기 전화를 하며 어수선하거나 또는 너무나 태평하게 그저 기다리는 사람들과 함께. 순서가 너무 더디 진행된다.
이 와중에도 무인 티켓판매 머신에서는 취소된 열차가 버젓이 열려 있다(모르는 사람이 구입하자면 구입할 수 있는 상태). 시스템상 예약머신과 열차의 현재 상황을 연동할 수 없고, 삭제할 수도 없다는 거다. 오~ 이게 가능한 상황이란 말인가. 상상초월 기대이상.
주변 사람들에게 묻고(나도 모르겠다, 일단 기다린다),
호텔로 돌아가 이럴 때 더 나은 방법이 있는지 묻고(그냥 기다려라, 기차 회사에서 해결해 줄 거다),
우리나라 블로그 검색하고(어찌 되었든 환불해 주거나 다른 기차로 변경해 주니 걱정하지는 않아도 된다),
다른 기차 회사 직원에게 묻고(우리 기차는 취소되지 않고 정시 운행한다),
미안하지만 어제 만났던 가이드에게 연락해 묻고(오전에 다른 일행도 취소되어 환불하고 다른 회사 기차 티켓 사서 떠났다)
결국 아직 번호표 순서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른 회사의 기차 티켓을 일단 구입했다. 떠나기 전까지 내 순서가 돌아오지 않으면 티켓을 버려야 하는 선택이긴 했지만, 티켓 빠지는 속도가 빨라 고민하는 순간 매진되는 걸 눈앞에서 보고 급한 마음에 결제. 기다리고 기다려 티켓은 순조롭게(과연 순조롭다고 해야 하는가. 엄청 쿨내 나긴 했다. 돈은 제대로 입금되겠지) 환불, 또 기다리고 기다려 기차를 탔다. 그 사이 속절없이 사라진 한 움큼의 시간.
그래도 드디어, 이곳을 떠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 유럽에서의 기차 파업은 여행 중에도, 사는 중에도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파업의 목적까지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전체 파업도 아니고,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이 있으니 나폴리를 생각하면 애교 수준이다. 다만, 이후에는 기차 파업 예정된 것이 있는지 숙소에서 미리 문의를 했는데, 확실한 대답을 받은 적은 없었다. 아! 사전 고지 없이 파업한다는 얘기를 들었구나.
그보다 많은 유쾌한 만남
말도 안 되는 경험 때문에 떠남이 격하게 반가운 경우도 있었지만, 만남이 반가운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엄청난 명랑함과 소박하고 정성스러운 아침식사로 신나는 여행의 시작을 열어준 숙소의 호스트,
음식을 내올 때마다 웃음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건네는 음식점의 웨이터,
너희를 위한 특별한 선물이라며 주문하지도 않은 디저트를 내어준 웨이터(우리만을 위한 것은 아닐지라도),
사진을 찍어주니, 내 사진도 찍어주겠다며 탑 꼭대기라 무서워 움직이지 못하는 나에게 손을 내밀어준 커플,
한국인이라 반가워 식사하며 짧은 대화를 나눴던 한국 음식점의 사장님,
당신도 모르는데 테스트까지 하면서 주차권 사는 방법을 알려준 중년의 남성,
매장을 새로 옮기고 테스트 오픈 기간이라 현금결제만 가능하다며 미안함을 담뿍 담아 더듬더듬 안내하던 바리스타,
절제되고 세련된 매너로 여행의 마침표를 찍어준 숙소의 호텔리어까지
많은 이들이 우리의 그리고 나의 시간과 경험에 친절을 베풀었다.
그리고, 폴리냐노 아 마레의 음식점, 밀라노의 호텔, 피렌체의 카페에서는 말로만 듣던 한국에 대한 관심을 경험하기도 했다.
폴리냐노 아 마레 프랜차이즈 음식점의 한 점원이 한국어를 듣더니 먼저 반가움을 표한다. 이렇게 작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이 한국어를 알다니. 젊은 여성이었는데 혼자 유튜브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며, 속도가 느린 것 같아 고민이란다. 올해 11월 한국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때까지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걱정하지 말아라, 너는 할 수 있고, 또 여행하는 데는 충분할 거라고, 나도 여행한다고 얘기해 주었다. 그녀의 K-pop과 K-드라마에 대한 관심에 찬사를.
한 번은 피렌체에서 어수룩한 저녁에 커피를 한 잔 하러 낡은 카페에 들어갔다.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한국에서 왔다 했더니 주인장 할아버지가 엄청 반가워하는 거다. 마침 한국영화 페스티벌이 끝나는 시점이었는데, 그거 때문에 한국인들이 많이 왔었다고(그랬겠네요), 너도 그거 때문에 왔냐고(아니요), 영화는 봤냐고(아니오. 하하) 계속 질문을 하는 거다. 그러더니 잠시 뒤, 다시 테이블로 슬그머니 오시더니,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는 또 다른 할아버지를 가리키며 저 사람이 내 친구인데, 영화 관련해서 일을 하고 있고 한국에 관심이 많은데 대화를 좀 나눌 수 있냐고(사뭇 젠틀한 웃음 더하기)...
아,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정말 죄송해요. 너무 피곤해서 이것만 마시고 가려고요(머쓱한 웃음 더하기)...
여행은 수없이 많은 새로운 것과 익숙한 순간들로 이루어지지만, 그 사이사이는 사람으로 채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