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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디너리페이퍼 Jun 21. 2024

[오늘의단상] 끊임없는 평가에 대한 자세

평가하면 떠오르는 몇 번의 시험과 관련한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라 쓰지만 당시 국민학교) 4학년, 

왜였는지 모르겠지만 한 시험에서 반친구 몇 명과 쪽지를 돌리며 커닝을 작당모의 했고 당연히 선생님께 걸렸다. 시골 학교에서 공부를 꽤 하는 편에 속했던 나는 그날 처음으로 선생님에게 매를 맞았다. 그 이후로 커닝은 단 한 번도 꿈꾼 적이 없는 것을 보니 아주 호되게 혼난 기억이다. 키가 크고 어렴풋한 기억에도 카리스마 넘치는 여자 선생님이었다. 그 당시에는 카리스마라는 단어를 알지 못했겠지만 말이다. 다행히 오래된 성적표에도 이상이 없고, 학교에서 정학 같은 처벌을 받은 기억은 없는 것을 보니 호된 꾸짖음 만으로 넘어갈 수 없는 중차대한 시험은 아니었나 보다. 


중학교 1학년,

스스로 공부를 좀 하는 줄 알았던 나는 첫 중간고사 시험 성적을 받아 들고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망한 나를 언니 같이 키가 큰 반장 친구가 매우 어른스럽고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다. 그 친구의 점수는 모르지만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반장보다 내 키가 더 커졌다는 건 기억난다. 시험 뭐 중차대한 문제가 아니었나 보다. 


고등학교 3학년, 

수능시험 모의고사를 보고 낙담해 있었다. 시험 때마다 실망했던 것은 분명 아닌데, 낙담했을 때 생각이 많이 난다. 그 당시 항상 같이 다니던 친구와 한참 신세한탄을 하고 나서도 그 기운이 남았던지, 집에서도 좌절모드로 있었나 보다. 고 1이 되어 얼굴을 자주 보지 못하던 동생이 툭 던지듯 말했다. 뭐 시험 한 번에 일희일비하고 그러냐 라고. 싸가지 없지만 맞는 말 하는 놈! 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재수 없다고 했을지도). 그 이후 내가 시험 점수에 여전히 일희일비했는지, 아니면 좀 더 담대해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아마도 일희일비했을 거다. 대신 조금 덜 티 나게 노력하면서. 


대학교 1학년,

1년 치 성적이 나왔다. 2점 대 초반... 이란다. 그 이후로 별로 나아지거나 이렇다 할 만한 기억이 없다. 그저 4학년 말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위해 학점을 확인하면서, 대학생활 참 암흑기였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열심히는 했는데 공부도 노는 것도 그 결과물이 시원찮은 걸 보면 열심히의 대상이 막연했다. 

며칠 전, 그 대학 시절 몰려다니던 친구들을 몇 만났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이들을 보니 대학을 통해 내가 얻은 건 달라도 너무 다른 이 친구들 밖에 없는데, 지금 보면 좋은 시험 성적보다 이 친구들이 더 나은 것 같다. 일 년 가야 몇 번 연락 안 하지만. 


시험은 그랬다. 나의 과정과 노력을 오로지 하루 그것도 단 몇 시간 동안 내놓은 결과물로 나를 평가한다. 학생으로서 시험이라는 수단과 점수를 받아들이면서도 불만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래서 학교가 끝나면 시험이 없으니 홀가분할 줄 알았다. 


그런데 사회에 나와 일을 시작하고 보니, 여전히 평가는 존재한다.

입사나 승진을 위한 시험이나 자격증 시험과 같이 본인이 선택하는 평가를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아니, 연극하는데 평가를 한다고? 각자 역할에 따라 다른 일을 하고 다른 결과물을 내놓는데 어떻게 평가를 한다는 거야, 평가자가 한 명이 아니고 팀별로 다른 평가자 사이에 공정성과 편차는 어떻게 할 수 있는데, 평가 기준은 뭐고 얼마나 속속들이 알고 있어서 저 사람이 나를 평가한다는 거야. 

평가의 필요성은 물론이고 어떤 툴을 적용해야만 타당한지, 평자가와 툴은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지, 그에 따른 보상의 적절성과 공정성은 물론 평가와는 일견 무관해 보이는 형평성은 과연 논외로 할 수 있는지... 조직 내부의 많은 논의를 통해 하나의 결론을 도출해 내고자 하지만, 그건 구성원 모두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하고, 그래서 모두의 환영을 받지도 못하고, 또 적용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예상됐거나 예상하지 못한 문제점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가를 주고받았다. 그저 특정 기간에 한정적으로 이루어진 퍼포먼스를 평가 대상으로 한다는 기준 하에, 모두가 개인적인 감정은 제외한 채 공정하고자 노력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한 때는 평가에 무던했고, 한 때는 평가가 무방했고, 어떤 때는 평가에 날을 세워야 했다. 

평가 그까짓것 신경 쓸 것 없어! 라고 호탕하게 말할 수도 없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 제도 아래 있는 그네들에 대한, 우리들에 대한 무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 결과가 미치도록 오래가지 않는다는 거. 아니면 믿고 싶거나. 


그런데 더 무서운 건 평판이다. 

어디서 나와 어디로 흘러들어 가는지 본인으로서는 알 수 없고,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평가자의 마인드로 최대한 공정성을 기하며 심사숙고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며,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단 한 번의 경험으로 평가가 끝나 버리거나 또는 누적된 경험으로 형성되어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리고 객관적인 기준이 없기 때문에 말하는 이 개인의 성향이나 감정이 개입하곤 한다. 더욱이 묻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을 신뢰하기 마련인지라, 대답을 받아들이는 자에게 그 말의 무게가 더더욱 무겁다. 해명을 하려 해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세상은 수없이 많은 평판으로 돌아간다.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그러고 보면, 단 번의 시험이 세상 얼마나 간편한 평가의 수단이었는지. 

그만큼 대상을 파악하기도 어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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