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4컷 만화를 열심히 채우던 때가 있었다
어릴 적 만화도 그렸고 가사도 썼던 나는 만화가도 랩퍼도 되지 못했다. 하지만 엉성한 결과물에 '재밌네'란 얘길 듣던 때를 기억한다. ‘재밌네’라고 해주고 취향을 나누던 친구도 기억한다. 창작이란 거 그런 거 아닌가. 막연히 '대중'을 상정해 결과를 만드는 게 아니라, 사실은 다들 추앙하는 누군가의 등을 바라보며 만든다. 그리고 그 사람이 봤을 때 부끄럽지 않을 것을 만든다. 창작의 고통은 등으로 꽂히는 서늘한 시선으로 발현된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등을 바라봐 주고 의식하면서 조금씩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 나간다.
생각해 본다. 나는 누굴 상상하며 글을 쓰고 살고 있었나. 창 없는 벽, 바닥에 붙은 내 등은 따땃하니 잘도 잠이 온다.
<룩백>이 어떤 이야기인가를 들여다보는 일은, 나의 지난 과거를 돌아보는 것과 같다.
그래서 영화관을 나서며 떠오른 내 얘기를 좀 해볼란다.
<힙합>이란 만화가 있었다. 힙합을 좋아해서 <힙합>을 보고 만화가 좋아진 것인지, 만화가 좋아서 <힙합>을 보다가 힙합이 좋아진 것인지 불명확하다. 지금 생각하면 두 문화는 먼 것 같지만, 내겐 하나의 덩어리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 덩어리를 함께 가지고 놀던 친구가 있었다. 그것들을 왜 좋아했는지, 무엇을 더 좋아했는지, 무엇을 더 먼저 좋아했는지는 모르겠다. 어릴 적 내 취향은 이래저래 섞여있었다. 내 취향에 대한 기억은 그 친구와 얼기설기 얽혀있다.
좋아하는 무언가를 놓고 이유를 경쟁하듯 대는 관계는 정말 큰 복이다. 나는 그 친구와 만화도 그리고 랩도 쓰고 춤도 췄으니 큰 복을 누렸다. (공부는 안 했다.) 굳이 비중을 따지자면 만화를 많이 그렸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릴 시간이 가장 많았다. 수업시간에 춤을 추긴 뭐하니까, 몰래 하기 가장 적합하고 효율적인 활동이 그림이었다. 당시 우린 3ch식의 만화에 심취해 있었다. 떠오른 만화가 하나 있는데, 대략 이런 식이다. <주인공과 친구는 외국의 브레이킹 대회에 나갈 계획이다. 그러나 짠돌이 주인공은 비행기 삯을 지불할 능력이 없다. 그가 찾아낸 방법은 비행기 프로펠라 사이로 들어가는 것. 그는 숱한 노력 끝에, 이륙 전 빠르게 돌아가는 프로펠라 사이로 비행기에 탑승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친구가 연달아 프로펠라에 몸을 던지지만, 실패한다. 프로펠라에 잘린 팔다리는 사방으로 날아간다.> 나와 내 친구는 사지가 잘리는 장면에 특히 공을 들였고, 이 장면이 좋아 다른 만화에서도 여러번 그렸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지금의 고약한 취향이 이 때부터 생긴 것 같다.
우리는 이현도도, nas도 함께 들었지만, 드렁큰 타이거를 가장 좋아했다. 우연찮게 그 친구가 드렁큰 타이거 앨범에 참여한 뮤지션의 조카이기도 했다. 우리는 영어 가사를 한글로 옮겨 외우고, 노래방에서 랩을 하는 추태를 부리고, 결국 가사를 쓰는 지경까지 가고 말았다. 지금 보면 못봐줄 내용이지겠지만, 서로의 가사를 교정하고 칭찬하며 (나름대로) 조금씩 좋은 가사를 경쟁적으로 썼다. 결국 지금의 나는 랩퍼도 만화가도 되지 못했지만, 친구와 나눴던 취향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다. 잔인한 게 웃기고, 비주류인 게 좋고, 글 쓰는 것이 좋은 나로 커버렸다. <룩백>은 누구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을 '그 친구'를 불러낸다. 어릴적 뭔가에 열중한 적 있다면, <룩백>이 일으키는 푼크툼이 내 머리에 정면으로 충돌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에 마주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 커버린 내겐 그런 친구가 있을까. 그런 관심사가 있을까."
* 스포 포함
<룩백>이 그저 쿄모토의 죽음으로 끝났다면 궁상 좀 떨다가 잊혀질 영화였을 것이다. <룩백>의 중요한 의미는 쿄모토의 죽음 그 다음이다. 죽은 쿄모토의 방문 앞에서, 후지노는 과거 자신이 그렸던 '방에서 나오라'는 내용의 4컷 만화를 발견한다. 후지노는 자책한다. "그리는 게 대체 무슨 의미야. 다 내 잘못이야."
서로의 등을 바라보고 성장한 두 명 중 한 명이 사라지면,
남은 한명은 어떻게 될까. 이제 무엇을 바라 보며 나아가야 할까.
후지노는 닫힌 문앞에서 상상해본다. "만약 내가 그 만화를 그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쿄모토는 뭐라고 내게 말해줄까" 그 상상 속에서 가라데 수련원이 된 후지노는 미대생인 쿄모토를 만난다. 위험에 빠진 자신을 구한 후지노에게 쿄모토는 말한다. "후지노 선생님, 팬이었어요" 거기서 후지노는 묻어두었던 열정이 다시 되살아난다. "다시 그림을 준비중이야. 잘 돼면 내 어시가 되어줘"
다시 현실로 돌아온 후지노는 쿄모토의 방에 붙어 있던 빈 4컷만화를 본다. 그리고 문틈 사이로(작중에서 문틈은 닫힌 마음 사이, 서로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틈새' 같은 은유인 듯 하다.) 쿄모토가 보낸 '룩백'이라는 제목의 4컷만화를 받는다. 물론 쿄모토는 죽었으니 '룩백'이라는 만화는 후지노의 상상이다. 즉, '룩백'은 '쿄모토라면 내게 뭐라고 했을까?'의 대해 후지노 스스로 내린 답변이다.
여기서 빈 4컷만화는 등(back)과 조응한다. 우리는 등에서 많은 것을 읽어내기 어렵다. 그가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말하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저 우리는 뒤를 바라보며 그에게 닿기를 바라고, 내게 어떤 말을 해줄까 상상할 뿐이다. 후지노는 빈 4칸을 바라보며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길 결심한다. 후지노는 방에 걸려있는 쿄모토의 옷 뒤에 쓰여진 자신의 이름을 본다. 후지노의 등을 바라보던 쿄모토, 그런 쿄모토의 등을 통해 다시 자신을 바라본 후지노는 나아갈 용기와 힘을 얻는다.
+ 나는 원작 만화를 보고 영화를 보았는데, 영화를 본 뒤 원작을 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내가 성질이 급해서 만화를 슥슥 봐서 그런걸 수도 있지만, 영화가 설계한 속도감이 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 더 적절하다고 본다.
+ 소리가 훌륭하다. 절제된 감정과 긴장감을 표현하는데 정적을 잘 쓰고있고, 그 감정들을 터뜨릴 때 쓰이는 음악들은 더 잘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