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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dinaryjo Jan 18. 2021

비로소 뒷담화로 보이는 것들

니가 싫은 건 내가 싫어서


존속 살해와 같은 범죄자는 모두의 경멸을 받는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덕선을 넘었기 때문이다. 수준의 차이는 좀 있지만, 일상에서도 경멸할만한 사람들은 있다. 존속 살해범이 먼 경멸이라고 치면, 후자는 가까운 경멸이라고나 할까. 오늘은 가까운 경멸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얘기할까 한다.


예를 들어, 문제의 인물이

'잘나가는 지인들을 소개하면서 거들먹거린다'

가 문제라고 하자.


사람이 싫을 땐 "그냥 싫어"라고 하는 게 속 편하다. 하지만 나는 결국 이유를 찾게 된다. 단순히 감정만이 아니라 이성적 판단의 결과라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드는 근거는 행동이다. 그의 행동이 잘못되었음을 주장한다. 빗대자면, "저 새끼는 저거 자기 자신에 대한 증명이 스스로 안 되니까, 남한테 저딴 식으로밖에 증명을 못 하는 겨"라고 해두는 거다. 


하지만 한 번 더 들여다봤을 때, 매번 그곳에서 나를 본다. 경멸스러운 인간은 단순히 행동 때문에 경멸스러운 것 같지만, 알고 보면 행동을 하는 속내(의도)가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물론 그 속내가 맞는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것은 대부분 직관에 의한 것으로, 그가 했던 행동들과 뉘앙스로 그냥 지레짐작을 해보는 것이다. 나는 그 직관이 상당수 맞을 것이라 믿고 경멸하겠다는 판단을 내린다. 즉, 그 믿음을 크게 뒷받침하는 것은 ‘나 자신’ 때문이다. 내가 그 속내를 추측할 수 있는 이유는 알고 보면 나에게도 그러한 경험이 있거나 최소한 그런 마음을 먹어봤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를 경멸한다면 그 이유는 나 자신의 추악한 모습을 남을 통해 바라봤기 때문 아닐까.

그 추악함을 숨기기 위해 그를 분석한 마냥 떠들고 깜으로써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남에게 납득시키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심연을 보면 심연도 나를 본다.

추악함을 보았다면 나의 추악함도 함께 부끄러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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