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김없이 노트북을 챙겨 나섰다. 오전부터 전화를 받느라 목이 좀 아팠는데, 오레오가 현관 앞에서 헥헥거리는 걸 보니 같이 나가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 오늘은 미팅이 있어서 조금 힘들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문을 닫았다. 이런 기분이 들 때면 늘 무심결에 나오는 말—“그래도 갈 데가 어딘가 있어야지.”
다행히 오늘은 일찍부터 재킷을 꺼내 입었는데, 평소보다 살짝 쌀쌀하다는 예보를 들어서다. 지난주엔 패딩이 들어간 재킷을 걸쳤다면, 오늘은 비교적 가벼운 후디를 택했다. 안에는 유니클로 면 티셔츠를 입었고, 밑에는 그냥 늘 그렇듯 적당히 색이 바랜 리바이스 진을 골랐다. 신발은…발치에 놓여 있던 오래된 뉴발란스를 걷어 찼다. 옷차림이란 게 어차피 즉흥적일 때가 많으니까.
낮 미팅 장소는 도심의 어느 카페였다. 세련된 분위기가 아니라, 꽤 소박한 느낌의 동네 카페였는데, 오히려 내겐 그게 편했다. 사실 사람 많고 낯선 장소엔 흥미가 거의 없어서, 대형 프랜차이즈보단 이런 자그마한 공간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도 대표님이 와서 자리를 잡아놓고 있다고 해서 마지못해 나가 보니, 벌써 카페 한쪽 테이블에 열 명은 족히 돼 보이는 인원이 잔뜩 모여 있었다.
‘아, 이런 모임이면 아는 사람이라도 좀 불러주지.’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일단 테이블에 가까이 가서 서명 용지를 작성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양복이나 포멀한 원피스 차림인 것 같았는데, 나 혼자 T셔츠와 진, 낡은 스니커즈가 눈에 띄어 조금浮(부)쩍했달까. “왠지 혼자 떠 있어도 괜찮을 거야”라는 체념 반, “이상하게 쳐다보면 어쩌지”라는 불안 반이 얽힌 기분이었다.
행사 담당자가 “좋은 상품이 준비돼 있으니, 끝까지 함께하시면 좋겠습니다!”라는 환영사를 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엔 ‘이런 상품보다는 그냥 샴페인 한 잔이 더 낫지 않나’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워낙 술 종류 중에는 샴페인만 마시기에, 새삼 다른 사람들 손에 들린 커피나 주스가 이질감으로 다가왔다. ‘낯선 사람 만나기 싫고, 사진 찍히는 건 더 싫은데…’ 하는 생각까지 끼어드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는 카페 구석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펼쳤다. 소셜미디어 피드를 대충 확인해 보는데,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수영장에 간 지인이 수영복 인증샷을 올려놨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나도 새로 산 수영복 한번 입어야 하는데’ 하고 괜히 씁쓸해졌다. 수영장 물살을 가르고 있을 시간에, 여기서 어색한 모임에 끼어 있는 현실이 유난히 나를 짜증나게 했다.
게다가, 사람 몇 명이 사진을 찍자고 다가오길래, 살짝 손사래를 쳤다. “죄송해요, 전 찍히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 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인플루언서로 활동한다고 다 사진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난 내가 찍는 건 좋아도, 내 얼굴이 사진에 박히는 건 왠지 불편하다. 그들은 ‘인플루언서라면서?’라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실망스러운 웃음을 보냈다. 그 순간, 괜히 오레오가 떠올랐다. 사진이라면 그 녀석이 훨씬 잘 담길 텐데.
행사가 어영부영 진행되고, 바야흐로 ‘네트워킹 시간’이 왔다고 했다. 소규모라면 모를까, 이렇게 많은 인원이 우르르 몰려가면 호들갑스럽게 서로 명함 주고받는 게 전부 아니겠나. 애초에 사람 만나는 일이 드물고 낯선 걸 싫어하는 나로선, 이런 프리 토크 시간만큼 고통스러운 게 없다. 그냥 “포털 사이트에 치면 나와요” 정도로 대충 말하고, 슬쩍 자리를 빠져나오는 게 버릇이 돼 버렸다.
문득, 누군가 태닝샵이나 섹슈얼한 모임 얘기를 꺼내면 또 모르겠다. 야동이나 섹스 토크를 섞어 둔 화끈한 대화라면 호기심이 생길지도. 조금만 더 과감한 주제가 오가면, 그 불편한 낯가림조차 뚫고 뭔가 흥미로운 스파크가 일어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여기선 전부 인스타 마케팅이 어떻고, 대행사 수수료가 어떻고… 귀에 들어오지도 않는 주제가 이어졌다.
“하아, 그냥 갈까.” 생각보다 일찍 기력이 소진돼, 조용히 가방을 챙겼다. 대표님이 “벌써 가요?” 하고 묻길래, “집에 강아지 두고 나와서요. 급히 들어가 봐야 해요”라고 둘러대고 카페 문을 열었다. 밖으로 나서자, 햇살이 생각보다 더 강렬했다. 눈을 살짝 찌푸리며, 나도 모르게 습관처럼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혹시 수영장에 들른다면, 아직 한두 시간쯤은 물에 몸을 맡길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서더라.
의외로, 이런 ‘도망치듯 빠져나오기’가 내겐 잘 맞았다. 굳이 매달리고 싶은 인맥도 없고, 내 회사 운영엔 내가 편한 방식이 있다. 때때로 설레는 데이트나, 오레오랑 함께 보내는 시간, 그리고 수영을 즐기는 순간이 훨씬 가치 있다. 필요하면 누구든 온라인으로 협업 제의를 하거나, 내가 직접 상대를 찾으면 되니까. 굳이 오늘의 먼지 같은 네트워킹에 영혼을 소모하고 싶진 않았다.
발길을 돌리며 가만히 생각했다. “나처럼 유니클로 티셔츠에, 낡은 뉴발란스 신은 사람이 이 모임에 더 있었을까?” 라는 쓸데없는 궁금증이 스쳤다. 어쩌면 하나쯤 있긴 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일단 내 눈엔 안 띄었다. 어쩐지 여전히 주변 사람이 전부 ‘누군가를 의식한 멋’으로 포장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다음엔 프라다 재킷을 입거나, 다른 스니커즈를 신어볼까. 알 수 없는 내일이지만, 적어도 옷차림으로 스트레스를 받긴 싫다.
한편, “섹스 앤 더 시티”스럽게 오늘 밤이라도 화끈한 이벤트가 있을 순 없다. 스케줄을 보니, 그냥 오레오랑 집에서 비스듬히 누워 야동이나 볼 확률이 높다. 그렇지만 언젠간 또 귀찮은 모임 한가운데서 어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설레게 될 수도 있는 거다. 그게 도시 생활의 아이러니고, 내가 여전히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는 이유. 끝도 없는 반복이지만, 가끔은 뾰족하게 반짝이는 순간들도 나름 가치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