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 법대로 한다 Mar 08. 2020

당신은 에너지 뱀파이어입니까?

‘아니, 생각할수록 걔 웃겨’   

  

2시간째다. 아니 일주일 내내 열네 시간째 통화 중이다. 썸 타다 뻥 차인 그 남자애 원망을 열네 시간째 하고 있다 그녀는. 나름 포기하라고, 아니면 대놓고 꼬시라고 해결책을 제안해도 어차피 안 할 거란 걸 안다. 그녀는 항상 그렇듯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 과정에서 힘들었던 상처를 내게 또 털어놓을 것이다. 그럼 난 또 끊기 미안해서 들어주겠지. 퇴근하고 쓸 원고가 있었는데 또 놓쳤다. 퇴근 후 일상이 그녀와의 통화가 전부이던 시절이 있었다. 남자 친구랑도 이렇게 안 하는데 참. 퇴근 후 남은 에너지를 그녀가 쏙쏙 빨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참았다. 우린 친하니깐, 그래 털어놓을 데 없으니 나한테 하겠지. 얘기해주는 자체로도 고마웠다.     


근데 종종 이상했다. 내가 고민 있어서 전화하면 그녀는 주말에 잔다는 이유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 편을 들어 그녀와 함께한 작가 욕을 해줄 때면, 나에게 예의 없단 말까지. 나보다 언니인데 욕을 한다는 이유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긴 게 난 그녀의 직장 동료를 본 적도 없고, 내가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그녀가 한 말이 전부였다. 근데 편 들어주려 한 말에 성을 내다니. 마치 내가 뒷담을 즐겨하는 애가 된 거 같은 기분이었다. 이러저러한 감정들이 켠켠이 쌓여 그녀의 말을 들어주던지 2년쯤 됐을 때 빵 하고 감정을 터뜨렸다.     


‘언니는 언니 얘기만 해’     


이에 잠깐 반박하고 감정 상해 그녀가 그 이후로 전화를 안 했다. 아, 내가 감정 쓰레기통이었구나. 그때 깨달았다. 근데 정이란 게 무서운 게 내가 힘들어지니 그냥 누구라도 잡고 털어놓고 싶었다. 그래서 1년째 연락 없던 그녀에게 연락했고 그녀는 술 한잔 하자고 제안했다.    


1년 만에 만난 술자리. 내가 힘들어하고 있는 걸 그녀는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내 얘기를 잠깐 들어주더니, 자기 얘기를 계속했다. 심지어 막판에는 술 취해서 같은 말 계속하는 그녀를 택시 태워 보냈다. 아 그녀는 오늘도 내 얘기를 들어주려 나온 게 아니라 자기 얘기를 하려 나온 거구나란 생각에 참 씁쓸했다.     


물론 내가 힘든 상황이라고 해서 상대방이 내 얘기만 들어주는 건 안된다. 그건 나도 힘들다. 근데 적어도 대화란 건 상호작용이다. 서로 패스가 돼야지, 일방적으로 한쪽만 공을 잡고 놀면 그건 경기가 안된다. 근데 그녀는 항상 혼자 공을 몰고 다녔고, 난 볼보이 리액션을 담당했다.     


이제까진 그녀가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해준다는 게 고마웠다. 근데 여기서 착각하면 안 된다. 이건 에너지 뱀파이어의 특징일 뿐이다. 에너지 뱀파이어는 굳이 친한 사람한테만 얘기를 털어놓지 않는다. 불특정 다수한테 얘기를 털어놓는다. 그리고 상대방이 편 들어주고 적당한 리액션이 있으면 계속해서 털어놓는다. 당신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만만한 거다. 그러다 상대가 불편한 기색을 들어내면 바로 다른 대상을 찾는다. 너는 내 감정 쓰레기통인데 감히 쓰레기통이 반응해? 이런 심보다.     


몇 년 동안 그녀의 얘기를 들어준 결과, 얻은 건 없었다. 나름 깊고 끈끈한 인간관계도 형성하지 못했고 내가 이렇게 들어줬으니, 나도 힘들면 들어주겠지란 막연한 보상심리도 보상받지 못했다. 결국 내가 잃은 건 내 시간뿐이었다.     


‘사랑은 내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란 이기주 작가님 말에 공감한다. 바쁜 현대 사회에서 시간을 내어주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기에 요즘 사람들이 전화보다 카톡을 선호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전화에만 오롯이 집중하고 싶지 않아서. 물론 모든 사람들의 전화를 다 받을 순 없다. 그럼 난 전화 상담원이 되어 있을 거다. 내 한정된 시간을 소수의 사랑하는 지인에게만 베푸는 요령이 필요하다. 에너지 뱀파이어에게 내 아까운 시간을 빼앗길 순 없으니.


그리고 항상 생각하자. 내가 누군가의 에너지 뱀파이어가 되어 있진 않은지, 누군가와 정기적으로 통화하고 있진 않은지. 누군가 당신의 전화를 격의 없이 받아준다면 당신은 그 사람에게 소중한 대상일 것이다.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당신도 받은 만큼 풀어줘야 한다. 요즘 시대, 통화는 ‘베프’의 기준으로 보아도 만무하니깐.  

매거진의 이전글 단골 호구가 된 다는 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