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 법대로 한다 Mar 28. 2020

단골 호구가 된 다는 거

‘너 취향 겁나 소나무야’


친구 말에 백퍼 공감한다. 내 취향은 33년 내내 늘 푸르디푸른 소나무처럼 한결같았다. 클래식한 호피, 광택감 도는 각 잡힌 가죽, 정체성 확실한 강렬한 원색, 이국적인 플라워 패턴, 달달한 바닐라 라떼, 빈티지한 스키니진, 유니크한 청자켓, 새빨간 머리, 섹시한 슈트.


이처럼 좋아하는 게 명확하다 보니, 숍도 가던 숍만 간다. 대충 이력을 살펴보면 네일숍은 4년째 한 곳만 다니고, 좋아하는 옷가게도 4년째다. 미용실은 사람 바뀌는 거 싫어 항상 VIP 이용권 끊어놓고 다니다, 최근 바뀐 디자이너는 이제 2년째다.


워낙 자주 가던 숍들이기에 난 가면 그들이 하자는 대로 대부분 따르는 편이다. 특히 옷가게는 내가 가면 매니저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진다. ‘호구님 강령하셨다!’란 마음을 대변하듯 그녀의 얼굴이 급 화사해지며 옷을 잔뜩 보여주며, ‘예쁘다!’를 연발한다. 그녀의 칭찬이 장사 속임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기분 좋아지는 건 본능. 대부분 결제를 한다. 그리고 정말 안타깝게도 그녀가 보여주는 옷은 정말 찰떡같이 내 취향이다. 도무지 거부할 수가 없다. 하아... 그래서 돈 없을 땐 쇼핑몰을 가도 일부러 단골 매장을 들리지 않는다. 매장에 들어가는 순간 난 단골 호구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해 주고 나올걸 알기에.


내가 좋아하는 그 옷 매장은 ‘에고이스트’다. 전국 어느 백화점에 가도 깔리고 깔린 브랜드. 근데 난 멀어도 내가 방문하는 그 매장만 간다. 옷도 옷이지만 그 매니저가 좋아서 간다. 나한테 물건을 권하면서 무례함을 넘지 않고 센스는 지키는 그 선이 좋다.


내가 단골 숍을 픽하는 기준은 퀄리티와 사람. 내가 단골 숍에선 호구가 되지만 다른 데서 난 까탈스러운 손님이다. 좋아하는 기준이 명확하다는 건 싫어하는 것도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보면 다 조건이 붙는다. 그냥 가죽이 아닌 ‘광택감 도는 각 잡힌 가죽’만을 사랑한다. 이런 까탈스러움 덕분에 그동안 전전한 미용실도 제법 많다. 마음에 들지 않은 이유도 다양했는데. 말을 많이 시켜서 싫어. 손이 자꾸 얼굴을 쳐서 싫어. 불친절해서 싫어. 말이 가벼워서 싫어. 싫어하는 이유도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내가 단골 호구가 되어주면 정말 호구로 본 다는 게 문제였다.


예로 미용실에서 한 디자이너한테 4년 동안 시술을 받은 적이 있다. 그녀가 실장 때부터 원장이 될 때까지 함께했고, 엄마와 함께 이용했기에 매번 이용권 100만 원 이상 끊어줬다. 그런데 그토록 친절하던 그녀가 원장을 달면서 태도가 돌변했다. 내가 하려는 시술에 번번이 태클을 걸어 가르치려하고, 면박을 줬다. 아 또 자리가 사람을 변화시켰구나. 얘도 이제 안되겠다. 굿바이. 


불행히도 여태 이런 경우가 참 많았다는 거. 관계가 오랜 시간 지속되면 오히려 손님한테 갑질을 한다. 결국 그 사람의 인성은 거기 까진 거겠지. 매번 단골 숍을 찾아 헤매는 나에게 친구가 뭐하러 힘들게 사냐고 말한다. 그냥 한번 받고 마음에 안 들면 새로운 애한테 하면 되지. 물론 그럼 편하겠지만 난 내 삶이 까다롭게 채워졌으면 좋겠다.


단골 숍에서 서비스를 주면, 난 굳이 필요 없는 시술을 받으며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서로가 서로에게 서비스를 주는 주인과 손님의 관계. 서로가 서로의 호구가 되어주는 정에 의한 관계를 꿈꾼다. 내 주변 인간관계가 그러하듯이.


까다롭게 정화한 내 인간관계는 진짜 원석들만 남았다. 내가 원석을 선별하는 이유는 딱 하나. 서로가 서로의 호구가 되어줄 수 있는가. 단골 호구, 평생 호구가 되어준다는 건 마음을 온전히 준단 얘기다. 빡빡한 세상이지만, 내 사람한테는 값진 호구가 되자, 그래야 인생에 서비스도 있을 테니.     

매거진의 이전글 4월 1일 거짓말이길 바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