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령
마치 어떠한 굵은 선이 내 그림자를 꽁꽁 싸매고 있는 듯한 기분이 며칠 째 떠나지를 않았다. 이 선은 도대체 뭘까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로부터 만들어졌으며 왜 생겨난 걸까. 늘 그렇듯 내 탓을 했다 내가 직접 그어버린 선이라고 치부했고 나의 못남 때문에 만들어졌다 답을 내렸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스스로 선을 긋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지 않는 나는 여태껏 그래 왔듯 더 힘차고 날쌔게 선을 만들어낸다.
선은 뭘까, 디자인을 조금이나마 공부한 나는 당연히 세 가지 이상의 선을 너무나도 인지적으로 떠올린다. 수평선, 수직선, 사선, 직선, 곡선, 구불거리는 선, 흐르는 선.. 이내 머리를 세차게 흔든다. 지금은 그런 '디자인적' 접근을 굳이 하고 싶지 않으니 말이다. 좋아하는 네*버 국어사전의 도움을 받기로 하자.
선_線
1. 그어 놓은 금이나 줄.
2. 물체의 윤곽을 이루는 부분.
3. 다른 것과 구별되는 일정한 한계나 그 한계를 나타내는 기준.
4. 어떤 인물이나 단체와 맺고 있는 관계.
사실 네*버 국어사전에는 열 가지의 뜻이 있지만, 그중 내 맘대로 내 맘에 드는 것만 골라왔다.
나는 '선'을 싫어한다. 극도로_ 굳이 선이라는 게 필요할까, '선'은 뭔가 딱딱하고 길쭉하고 그냥 너무 차가운 느낌이다. 나는 부드럽고 유연하며 따뜻한 것을 좋아하는데.. 이러한 나의 취향에 따라 내 인간관계도 내가 편한 대로 혹은 익숙한 대로 흘러갔다. 물론 일을 하는데에 있어도 마찬가지(요즘 많이 하는 내 MBTI는 IN'FP'다)
쉽게 말해, 마음에 맞는 사람이나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든 달려들었다. 달려들었다는 표현이 딱 적당하다. 나이가 어떠하든 성별이 어떠하든, 어쩌면 상대방의 기분이 어떠하든(지금 생각하면 배려가 없어도 너무 없지) 그것이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었고 안타깝게도 내가 살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말이다.
이토록 나의 MBTI까지 언급해가며 고작 '선'이라는 것에 대해 뜸을 들이는 이유는 이 놈의 '선'이 나에게는 그저 직선, 곡선, 사선 따위의 것이 아니었다는 걸 뼈가 아리도록 깨달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오랜만에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만났었다. '친구'라는 것은 고등학교까지 혹은 대학교까지 라는 인생 선배들의 말을 들었지만 믿지도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았다. 왜? 왜지?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끼리도 마음이 맞고 방향이 맞으면 친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라며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우리는 누구보다 긴밀했고 친밀했으며, 서로에게 다정했고 즐거웠다. 어쩌면 좋은 친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정말 웃기고 어리석은 게 뭐냐면 '내가 믿고 있는 것이 무조건 진실'이라고 믿는 거다. 이 믿음은 내 앞에 놓인 돌부리가 되어 나를 넘어지게 했으니 아파도 이렇게 아플 수가 없다.
'친구'는 될 수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지켜야 할 '선'을 지키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그들은 지겨워했고 나는 억울했다. 그들은 기대했고 나는 기댔다. 선이 붕괴된 이유_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기대기도 힘들고 그렇게 기대하기도 어려웠을 테다. 우리는 우월감에 빠졌고 그들은 지금도 우월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다.(누군가를 비하하는 것은 아니고)
'어떤 인물이나 단체와 맺고 있는 관계'
네*버 국어사전의 네 번째 정의이다. 왜 우리는 '선'이 필요할까, 선의 '필요성' 같은 것에 이제는 그만 집중하고 싶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하고 그만 생각하기로 약속하자. 오늘이 정말 마지막일 거다. 쉽게 생각하면 공사장 같은 거다. 공사장에 설치되어 있는 바리케이드처럼 말이다 그 바리케이드를 넘어가면 다칠 수도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마치 공사장과 같아서 안전한 듯 하지만 위험하다. 위험한 듯 하지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횡단보도도 일종의 규칙과 같은 '선'이고, 공사장의 '바리케이드'도 부상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이다. 웃긴 건 교통수칙을 어겨도_사고는 있지만 말이다.
이런 세상에서 나는 과감하게 선을 넘었다. 선을 넘는지도 모른 채, 이 선이 붕괴되는지도 모른 채, 이 땅에 금이 가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붕괴된 땅은 파편을 만들었고, 파편들이 모여 두 개의 땅이 만들어졌다. 하나의 파편에 서 있는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시속 150km를 초과한 나의 '관계 속도'는 어쩌면 중앙선을 침범했으며 처절한 교통사고를 낳게 되었다. 누구의 탓일까, 어디서부터 잘 못 된 걸까. 사고 난 차는 어떻게 고쳐야 할까, 다친 사람은 누가 고쳐줄까. 몇 달째 답이 안 나오다, 안 나오다, 드디어 조금은 실마리를 찾았다.
의도치 않게 일어난 '관계의 충돌사고'로 아파하는 누군가에게 약이 되기를.
마음 같아서는 내가 액셀을 밟게 된 나의 유년시절이 만들어 낸 기질을 탓하고 싶지만,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냥 서로 몰라서 그런 거다 규칙을 몰랐던 거다_안타깝게도 우리는 모두 아픈 거다. 나만 아픈 줄 알았는데 그대들도 아팠던 거다.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거다. 서로에게 인상 깊은 기억을 주고 싶었던 거다. 이토록 내가 문장까지 적어가며 이 사건을 기록할 만큼_우리는 아니, 그대들과 나는 선을 과감하게 넘었던 거다. 후회는 없다 즐거웠으니 충분하다. 그리고 앞으로 만날 나의 사람들에게 감사하다 시속 70km 정도로 달리며 함께(?)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술은 한 잔이면 족하다 2차에서는 소주 한 병이면 충분하다. 선을 넘지 않기 위해 브레이크를 밟는다고 해도,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무리하지 말자. 사랑하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딱 두 잔만,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