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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가닉씨 May 06. 2018

새로운 공간에서의 첫 끼

고생한 우리에게 닭곰탕을


어렸을 때 내 방을 어렵게 가져서 그런지 나는 공간에 대한 애정이 많은 편이다. 작은 공간에서 무언가 혼자 사부작리면 나만의 세계가 펼쳐지는 기분이랄까.

결혼 전에는 거실에 누가 없어도 굳이 작은 내방으로 들어가 있는 걸 좋아했다. 사실 딱히 하는 것도 없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누워 핸드폰을 보거나 그냥 멍하게 있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 자그마한 공간에서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무척이나 주체적인 나를 발견하는 일이야 말로 확실한 행복이 따로 없다.


결혼 이후, 나의 공간 철학은 더 확고해졌다.

 '매일 붙어있을 수 있어서' 결혼하고 싶다는 건 나에겐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생각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같이 붙어있는 것이야 물론 좋을 테지만, 각자의 공간으로 대피해야 할 일이 종종 생기는 아이러니한 것이 또 결혼이기 때문이다.


"어휴, 정말 우리 집이 100평이면 좋겠어!"

진심으로 바랐다. 남편과의 감정 퇴근이 필요한 날에는 백 평짜리 집이 간절했다. 현실적으로 어딘가 분리된 나만의, 혹은 각자의 공간이 필요했다.

감정이란 소용돌이는 퇴근뿐 아니라 출근도 필요하다. 나만의 세계에서 무언가를 끄적거리고 싶을 때 혹은 그래야 할 때, 온전한 내 공간으로의 출근이 필요했다.


-

이전 집(그새 전 집이 되어버렸다) 앞엔 왕숙천이 흘렀다. 몇 걸음만 나가면 하천길이 있었고, 다닥다닥 붙어있는 서울의 시가지와는 정반대로 동네 전체가 고요했으며 옆 건물과의 간격도 널찍했다. 높은 건물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웠고, 옆 단지 아파트촌에는 고층이 아닌 저층 아파트가 있었다. 우리의 공간은 아담했다. 화딱지가 나서 둘 중 하나가 방에 콕 박혀있어도 숨소리는 물론 뒤척이는 소리까지 들렸을 정도로.

남편과 심하게 싸우고 도저히 감정을 추스르기가 어려웠을 때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어플로 근처 호텔을 찾는 것이었다. 이김에.. 라면서(하지만 진짜 나간 적은 없었다).

감정 퇴근과 출근이 간절한 나날을 반복하며, 남편과 부대끼는 것조차 익숙해졌다.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을 우리는 그 집에서 보냈다.

 

5년 동안 잘 살았어, 이제 안녕!


-

"여기가 어디여?"

"몰러, 이게 뭐지. 허허"

그렇게 오지 않을 것 같은 2018년이, 그중 5월이, 그 여러 날 중 이삿날은 결국 왔다.

이벤트의 날을 숱하게 겪어 봤지만, '새로운 공간'에 거는 기대는 좀 달랐다. 이는 '여행날'과 거의 흡사한데 가장 큰 차이는 여행은 끝이 있지만, 이 이벤트는 끝이 없는 것만 같아서 마치 인생의 거대한 전환점을 맞는 느낌이었다.


이젠 같이 지내는 방, 각자의 방, 그리고 나의 주방이 생겼다.

오래전 이사가 결정되고 나는 안방이나 거실보다 내 공간을 어떻게 꾸밀지 매일같이 고민했다. 나만의 세계를 다시 마주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 공간에서 무엇을 해야 가장 행복해할지 너무나 잘 알았다. 마치 5년 동안 차곡차곡 마음에 쌓아둔 행복을 한 번에 푸는 느낌이랄까.

춤을 추며 요리하고, 책장 앞 바닥에 누워 손이 가는 책을 꺼내 읽다가 잠이 들기도, 음악을 크게 틀고 미러볼을 굴리면서 웃고 있는 우리의 모습. 마음껏 감정 퇴근과 출근을 이어가며 나를 추스르고 내 세계를 가꾸는 상상까지.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내 잔소리가 없는 자신의 공간 공간에서 맘껏 누워 티브이를 보는 상상을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밥상으로부터 시작될 우리의 모든 이야기. 밥을 지으면서, 마주하며 먹으면서, 정리하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교감할 그 공간을 말이다.


"배고파..."

남편의 말에 무언가 머리를 쾅-하고 때린 느낌이 들었다. 이사 준비를 한답시고 살림을 손 놓은 지 어언 두어 달.

그리고 가장 중요한, 새로운 공간에서의 첫 끼.

이번 이사때문에 정말 많은 고생한 남편을 위해 따끈한 국물을 준비하기로 했다. 냉장고를 열었다.  

다시 살림이 시작된 것이다.

새로운 이곳에서.




고생한 우리에게
따끈한 닭곰탕

텅텅 빈 냉장고를 털어

닭곰탕 만드는 방법(아니 삼계탕, 아니 닭곰탕, 아니..ㅅ...)

냉장고에 든 모든 채소를 꺼냅니다.

     (저는 파 흰 부분, 양파, 통마늘 그리고 마침 대추와 인삼이 있어서 넣었어요)

닭의 지방을 제거해 사 등분을 내어 준비한 채소와 한 시간 정도 푹 끓입니다(1).

닭만 건져내어 한 김 식힙니다.

    (1은 계속 끓입니다)

닭의 살이 식으면 잘게 찢어 다시 1에 넣고, 1의 흐물 해진 채소와 둥둥 뜬 기름을 건져냅니다.

마지막으로 다진 파(흰 부분)를 고명으로 얹어 마무리


+ 그리고 닭곰탕인 척 하려고 양념부추

고춧가루, 간장, 참기름, 설탕, 겨자가루, 새우젓 국물을 넣어 섞습니다(2).

   (저는 없어서 냉장고에 있는 걸로 했지만 보통 다진 마늘과 액젓을 넣더라고요)

부추를 먹기 좋게 등분해서 먹을 만큼만 덜어내어 2에 잘 섞어줍니다.

마지막으로 깨를 솔솔


양념된 부추는 국물에 넣어 먹어도 맛있고, 살에 올려 먹어도 맛있어요.

새 공간에서 먹는 우리의 든든한 첫끼가 드디어 완성됐습니다.

든든한 삼계탕 같은 닭곰탕 완성


"하... 잘 먹었다."

앞으로 이 새로운 공간에서, 밥상 위에서 우리의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됩니다.

나만의 공간이 생겼으니 앞으로는 글도, 찍는 것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모든 건 부지런히 하렵니다!






아직 미완성이지만 구석구석 우리의 손길과 마음이 닿을 새 공간을 소개합니다.

차차 완성될 날을 고대하며 :)

소소한 일상에서 우러나는 흐뭇한 웃음, 유머러스한 티격태격 싸움, 때로는 멍청할 수도 있는 작은 궁리들,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디어가 솟아나는 순간, 쓸쓸함을 자아내는 안개가 걷히는 듯한 느낌, 먹구름 사이로 찬란한 햇빛이 비추는 것 같은 느낌, 자기 자신을 슬며시 로맨틱하게 느끼는 순간, 자신을 코믹하게 느끼는 순간, 뭔가 훌쩍 큰 것 같이 느끼는 순간 등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미소가 우리의 행복감을 올려준다. 행복감을 자아내는 수많은 순간들이 집에 있다. 얼마나 고맙고  아름답고 또 귀한가?

김진애 저 <집놀이> 중


언젠가 땅과 가까워질 그 날을 고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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