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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온 Jan 20. 2024

나의 은사님들

항상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참!


 아침부터 들려오는 외할아버지의 호통소리에 눈이 떠졌다. 또 분명 외할머니와 아무것도 아닌 일로 티격태격 싸우고 계신 거겠지. 다시 잠을 청한다. 익숙한 아침 풍경이다. 외할머니가 무언가를 하시면 외할아버지는 꼭 딴지를 거신다. 하지만 대개 외할머니가 옳다. 보나 마나 10분 뒤에는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커지겠지.


 아, 내가 뭐랬능교! 아까 그게 맞다 카이!




 초등학교 고학년, 우리 남매는 외갓집에 맡겨졌다. 부모님이 당시 금전적으로 어려운 위기에 처했고 두 분 다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해서 우리를 돌봐줄 수 있는 외갓집으로 보내진 것이다. 당시 캐나다에 막 돌아온 나는 한국어도 서툴렀고 한국 교육과정을 따라가는 것도 힘들었다. 왕년에 초등학교 선생님셨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나의 교육울 맡아주겠노라 하셨던 것 같다. 그게 당시 나에게는 지옥이었다. 학교를 마치고 집이라는 학교에 다시 등교를 하면 전직 선생님 두 분께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나는 외할아버지 선생님보다 외할머니 선생님을 좋아했는데, 왕년에 호랑이 선생님이셨던 외할아버지 선생님께서는 잘 따라가지 못하는 나를 보시곤 답답해하셨는지 곧잘 호통을 치시곤 하셨다. 반면 외할머니 선생님은 수업 중간중간에 당시 유행했던 중국 드라마, 황제의 딸도 같이 보곤 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를 교육하는 건 외할머니 선생님의 담당이 되었다. 호랑이 선생님은 그 시간에 정원을 가꾸셨다. 아무리 외손녀여도 한국어가 어눌한 아이에게 개념을 제대로 설명하기도 힘드셨을 텐데 우리 외할머니는 천성이 차분하시고 조곤조곤하신 분이셔서 차근차근 나에게 알려주셨다. 당시 나는 물건을 떨어뜨리면 "웁스!", 어딘가에 부딪히면 "아우치!" 하며 외치는 아이였는데, 외할머니의 가르침 덕분에 예의 바르고 올바른 언행을 구사할 수 있는 어린이가 되었다. 수학시간이 고비였는데 나는 도무지 수학과 친해질 수 없었다. 뭔 놈의 원통의 부피를 왜 맨날 재야 하는지, 소금물의 농도를 왜 내가 알아야 하는지, 몇 초 뒤에 출발한 사람의 속도를 왜 내가 구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찬찬하고 조곤조곤하신 우리 외할머니 선생님은 수학시간만큼은 단호하셨다. 보통은 내가 "할매, 우리 황제의 딸 보고 하자." 하면 보통 "응, 그쟈? 힘들재? 오냐, 그래. 딱 한 시간만 보는기다." 하며 못 이기시는 척 함께 드라마를 보곤 했는데 수학시간은 달랐다. "안된데이! 이거 다 하면 그때 보자꾸나." 하며 호통을 치실 외할머니의 단호한 반응을 알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번 땡땡이를 시도해 봤다. 하지만 매번 실패했다.


 우리 호랑이 선생님은 나에게 노래를 가르쳐주셨다. 외할머니 선생님께서 풍금을 치시면 옆에서 동요를 부르시며 나에게 함께 부르시길 강요하셨는데 문제는 내가 모르는 곡들이었다. 외할머니 선생님과는 달리 외할아버지 선생님은 고집은 있으시고 참을성은 없으셔서 버럭버럭 금방 화를 내시는 분이셨지만 예술과 식물은 진정으로 사랑할 줄 아시는 분이셨다. "할배! 할배! 이거 무슨 식물이야?" 하고 물으면 식물 백과사전인 우리 호랑이 선생님은 활짝 웃으시며 그건 무슨 식물인지에 대해 오래도록 이야기를 해주셨다.


 호랑이 선생님은 가족의 뿌리를 중요하게 여기셨다. 조상님을 알고 조상님의 가르침을 잘 이어가야 지금의 우리 후손들이 잘 살 수 있다고 믿으셨다. 어린 나와 오빠를 앉혀두고 족보를 가져오셔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우리 집안이 어떤지에 대해 설명하신다. 귀에도 안 들어오고 재미도 없는  수업을 듣다가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할배, 내랑 오빠는 오 씨인데 이 씨 가문 족보를 왜 공부해야 해?"

 "성씨는 상관이 없다마. 중요한 건 느그도 우리 집안의 소즁한 손자 손녀 아이가, 으이? 이걸걸 배워야 인생이 환해져!"


 오 씨인 나와 오빠는 꼼짝없이 이 씨 집안 가문의 족보 공부를 해야만 했다. 우리 호랑이 선생님께선 대쪽 같으셨는데, 알고 보니 이 집안 자녀들과 결혼한 그 어떤 외부인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우리가 겪었던 것처럼 무조건 장정 5시간은 넘는 가문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한 번은 큰 이모가 결혼 상대로 미국인을 데리고 나타나자 호랑이 선생님은 영어 사전을 들고 카츄사 출신이었던 나의 아빠를 통역관으로 대동하면서까지 이모부께 강의를 하셨다고 한다. 처음엔 웃으면서 넘겼는데 일본인과 결혼한 우리 오빠가 새언니를 데리고 외갓집에 갔을 때, 정말로 개의치 않으시고 족보를 들고 오시는 당신의 모습에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 나는 학교보다 외갓집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며 자라났다.



 작년 2월, 한국에 잠시 들어갔을 때 나의 은사님이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인 두 분을 뵈러 다녀왔다.


 대구의 한 납골당.


 유리창 너머 두 분의 활짝 웃는 사진 보니 눈물이 고였다. 맨닐 티격태격 하시던 두 분이 손을 마주 잡고 미소 짓고 계셨다.


 할매, 할배. 내 너무 늦게 왔다 그쟈. 거 하늘에서는 싸우지 말고 두 분 손 꼬옥 잡고 천천히 산책하고 계시이소. 할매요, 할배요. 진짜 많이 보고싶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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