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리온 Jan 23. 2024

잊어버린 사람, 기억하는 사람

딱 좋은 관계

 어느 여름, 날이 참 더웠다. 그래도 습도가 높지 않은 편이라 그늘에 들어가면 숨이 트였다. 그렇게 쨍한 날이 계속되는 계절에는 필수적으로 들고 다니는 물건들이 몇 있다. 양산, 쿨토시, 하얀색 버킷햇이 그것이다. 그중에서 버킷햇은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소중한 것이다. 가격이 비싸거나 디자인이 빼어나게 예쁜 것도 아닌 기본 디자인에 면으로 된 모자이지만 소중한 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둘도 없는 물건이 되었다.

 얼마 전에 그 친구와 영상통화를 했다. 직접 보지는 못하지만 이렇게라도 얼굴 보면서 서로의 일상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너무 감사했다. 영상통화를 시작하기 전에 친구로부터 받은 모자를 쓰고 전화를 받았다. 모자를 보자마자 알아채겠지? 아는 체를 하면 '네가 선물로 준 모자를 아직까지 너무나도 잘 쓰고 있다'고, '선물을 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지.

 "뭐야, 실내인데 웬 모자야?"
 "응?"
 "어디 나가던 중이야? 나중에 전화할까?"
 "응? 아니, 이거 기억 안 나?"
 "그게 뭔데?"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당황해 결국 "이거! 네가 그때 사준 모자잖아." 하며 친구에게 호소했다. 그 말을 듣고 한참을 모자를 바라보던 친구는 "정말 내가 사줬다고? 기억이 없는데?" 하며 되려 내가 잘 못 안 것 아니냐고 나무랐다. 너무 우스웠다. 그리고 이 상황이 너무 좋았다. 준 사람은 기억하지 못하고, 받은 사람은 기억하는 이 상황이.

 공자께서 하신 말씀 중에 "베푼 것은 잊고, 은혜를 받은 것은 죽어도 잊지 마라"라는 가르침이 있다. 물론 준 사람도 받은 사람도 모두 기억하면 그거대로 좋겠지만 조금 불편할 것 같다. 그땐 괜찮았는데, 생각할수록 준 사람은 괜히 아까워할 수도 있고, 받은 사람은 괜히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일상 속에서 서로에게 주고받는 소소한 선물들이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점점 사라지겠지. 그건 너무 슬프다. 살아가면서 주고받는 선물이 생일 선물뿐이라면 너무 삭막할 것 같다. 그러니 이게 딱 좋다. 준 사람은 잊고, 받은 사람은 기억하는 것이.

 보자마자 "어! 너! 그 모자!" 하며 알아볼 것 같았던 친구의 반응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지만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기뻤다. 네가 준 사소한 선물들은 모두 내가 기억할 테니 너는 잊어도 좋다. 혹 언젠가 내 감정이 이번처럼 고마움으로 넘칠 때, 네게 "그때 그 선물해줘서 고마워"라고 말을 하게만 해주면 되었다.

 친구도 뭔가를 꺼내왔다. 빨간 립스틱이다. "웬 빨간 립스틱이야?" 하고 물은 내 질문에 친구는 "이거 네가 사준 거거든?" 하며 대답했다. 기억이 나질 않는다.

이전 02화 나의 은사님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