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셋, 첫 자취를 독일에서
학창 시절엔 말이다, 어른들이 하지 말라는 걸 하면 내 인생이 망할 것만 같았다. 야간자율학습을 째거나, 공부를 하지 않고 취미에 몰두하거나, 연애를 하거나, 결석을 하거나,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한다면 말이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공부만 하며 살아왔다는 말은 절대 아니지만, 대체로 하라는 것에만 집중했다. 그래선지, 내 학창 시절은 40년 전의 기억처럼 어렴풋이 남아있다.
반대로 내 기억을 완전히 지배하는 시절도 있다.
나의 이십 대는 스물셋이 되던 해에 시작한 것만 같다는 느낌을 간혹 받는다. 코로나가 그때부터 잠잠해지기 시작해서일지도 모르겠다. 마스크를 부분적으로 벗어도 되었던 시기, 2023년.
그 해는 나의 전부이고, 독일에서의 삶을 시작하는 해였다. 처음 혼자 살아본 해였다. 유럽을 자유로이 여행했던 해였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난 해였다. 또,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을 것들에 도전하는 해였다. 따라서 이 브런치북의 대부분은 스물셋의 나로 채워질 것이다. 스물셋 1편, 스물셋 2편, 스물셋 3편……. 앞으로는 독일에서의 이야기와 유럽 여행 이야기가 이어질 것이다.
여전히 생생히 기억나는 출국날. 부모님과 나는 차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동생은 잠을 자느라 함께하지 못했다. 탑승게이트를 통과하기 전, 부모님과 밥을 먹는데, 속이 울렁거렸다. 아마 차멀미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속이 불편해지자 신경이 곤두섰다. 조금 더 오래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몰랐던 건 아니지만, 나는 빨리 게이트를 통과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조금은 일찍, 작별인사를 나눴다.
"잘 다녀와. 연락하고!"
부모님의 말을 마지막으로 등을 돌리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뒤를 돌아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크게 손을 흔들어 주고 싶었는데. 뒤를 돌면 가득 찬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서 한 번도 뒤돌아 보지 않았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속이 편안해졌다. 아무래도 멀미가 아니었나 보다. 사실 너무 무섭다!
'도착하면 연락할게.'
그 문자를 보내고 나는 생각했다. 잘 다녀오겠다고 말해줄걸.
인천에서 뮌헨, 뮌헨에서 함부르크. 약 17시간의 비행 끝에 아주 늦은 밤, 나는 함부르크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택시로 5분 거리 숙소를 구해놓아서 바로 체크인해 쉴 수 있었다. 택시 기사님은 너무도 친절하셨다. 나의 첫 독일어 소통! 뿌듯한 마음도 잠시, 비행기에서 한숨도 자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에 연락을 남기고 바로 쓰러져 잤다.
다음 날 새벽, 눈이 금방 떠졌다. 시차 적응에 대차게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독일엔 편의점이 없다. 내가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곤, 전날 비행기에서 받은 작은 사과 하나와 초콜릿 하나. 그걸 먹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우중충한 독일의 날씨. 내 마음보다도 막막한 구름. 독일에 도착하고 한 일주일 간은 이런 날씨였다.
오전 6시쯤 되었나, 근처 키오스크가 여는 시간에 맞춰 밖을 나섰다. 우리나라의 키오스크는 주문하는 기계인데, 이곳의 키오스크는 편의점 같은 작은 가게이다. 나는 그곳에서 토스트 하나와 물을 샀다. 점심에 라면을 끓일 만큼의 충분한 물을! 그런데 내가 산 물이 탄산수였다. 이곳의 사람들은 탄산수를 정말 즐겨마신다. 그래서 초반엔 실수로 탄산수를 사는 일이 빈번했다. 나중에 가서야 독일어로 탄산수가 무엇인지 알게 되어서 내가 원하는 물을 살 수 있었다. 아, 놀랍게도 탄산수로 라면을 끓여 먹으면 더 맛있다. 면이 탱글하고 양념 맛도 더 매콤하니 맛나더라. 의도치 않게 별미를 알게 되었다.
첫 숙소에서 하루를 보내고 나는 기숙사 근처의 다른 숙소로 몸을 옮겼다. 커다란 캐리어 두 개와 배낭을 끌고 이동하는데 팔이 끊어지는 줄 알았다. 돈을 아끼겠다고 버스 타기를 포기한 결과였다. 새로 도착한 숙소에서는 독일어를 잘하지 못하는 나를 엄청 답답해하셨다. 가끔 영어를 써 주시는데도 악센트가 너무 세서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첫 소통 실패를 겪고 나는 꽤 우울해졌다.
'이곳에서 정말 1년을 살 수 있는 것일까?'
그때, 가족에게서 보이스톡이 걸려왔다. 동생의 목소리를 듣자 눈물이 주룩주룩 흘렀다.
'집에 가고 싶어!!! 돌아갈래!!!!'
속으로 수백 번을 외쳤지만, 입밖으로는 다른 말들이 흘러나왔다.
"나는 괜찮아! 날씨는 좀 별로지만 다음 주부터는 예보가 좋네!"
하루아침에 하늘이 맑게 개었다. 처음 만나는 아름다운 함부르크의 모습. 이 날은 탄뎀(Tandem)이라고 하는 언어, 문화 교류 파트너와 처음 만나는 날이었다. 아름다운 풍경, 내가 꿈꾼 유럽의 모습. 친절한 새 친구와 맛있는 식사까지. 너무도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Fischbrötchen이라고 하는 빵도 먹어볼 수 있었다. Brötchen이라는 작은 빵 사이에 절인 생선과 양파 등을 끼워 먹는 음식. 이야기만 들으면 비주얼이 별로일 것 같지만, 정말 별로다. 가히 충격적인 비주얼!
하지만 정말 너무 맛있어서 놀랐다. 그 이후로 Hamburger Dom이 개장할 때마다 하나씩 사 먹었다. 그렇게 우울하고 어두운 함부르크의 첫인상을 단숨에 바꾼 탄뎀 파트너와의 하루는 나의 함부르크 사랑의 시작점이 되었다.
무사히 기숙사 입주를 마쳤다. 처음으로 집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열쇠를 받고 (열쇠는 절대 잃어버리면 안 된다. 독일의 열쇠는 정. 말. 비싸다) 근처 이케아에 들러서 이불과 베개, 프라이팬, 조리도구 등 생필품들을 샀다. 그러고 보니, 이케아에서 한 독일인 여성분께서 내게 프라이팬에 관해 의견을 여쭈었다. 사이즈가 충분할지, 가격이 적당하다 생각하는지. 대화를 마치고 든 생각은 '너무 감사하다!'였다. 탄뎀 친구를 제외하면 나는 독일어를 잘하지 못하는 성가신 동양인으로 취급받았는데 처음으로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에 나를 받아들여준 느낌이었다. 감사해요, 이름 모를 친절한 이모!
그리고 기숙사 근처의 DM이라는 올리브영 비슷한 체인점에서 샴푸, 세제 같은 것들을 샀다. 자취 초보라면 공감하겠지만, 무조건 싸고 양 많은 거! 세탁 세제는 포로 된 드럼용 세제를 샀다. 계량 없이 세탁물이랑 함께 통에 넣는 칩 같은 세제 말이다. 아주 간편해서 요긴하게 썼다.
기숙사에 들어와서는 생각보다 너무 여유롭고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물론, 기숙사가 오래되고 더러워서 청소할 때는 또 눈물이 줄줄 흘렀지만. 오히려 모든 생필품을 갖추고, 청소도 끝내고, 더러운 공용 화장실에도 그냥 적응하다 보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따라서 나는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 있는 여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The Coffee Shop이란 카펜데 밖의 풍경이 정말 예쁘고, 커피 맛도 좋아서 자주 찾았던 카페다. 하지만 없어졌다고 한다... 흑흑 나의 추억. 이 당시엔 커피를 입에도 못 대서 차를 마셨다. 유럽은 차도 예쁘게 우리네, 생각했다. 이후로 커피 맛을 알게 되고, 카페에 무조건 대체 우유 옵션이 있어서 라테도 자주 마셨다. 한국에선 라테 = 배탈 직행이었는데 말이다. 유럽은 유당불내증 인간에게 최고의 환경이다. 이곳이 정말 좋아졌다.
독일로 향하기 전 목표로 삼은 것 중 하나가 동물 공포증을 극복하는 것이었다. 함부르크는 동물 공포증을 극복해 내기 좋아 보인다. 다만, 충격 요법으로. 왜냐하면 동물이 사방팔방에 널렸기 때문이다.
먼저, 조류. 함부르크엔 갈매기, 비둘기, 오리… 각종 조류가 땅과 하늘을 지배하고 있다. 나는 대체로 나에게 달려드는 새가 아니라면 그리 무섭지 않았기에, 이 사진처럼 귀여운 친구들을 구경하는 일은 좋아했다. 하지만, 물가에서 감자튀김 같은 걸 먹을 땐 새들을 조심해야 했다. 진짜 미친 것처럼 달려든다. 몇몇 교환학생 친구들을 혼절 직전까지 갔다는 후문이.
두 번째, 강아지. 독일의 반려견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훈련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산책할 때도 주인의 다리에 딱 붙어서 다니고, 주인 분들께서도 엄청나게 신경 쓰며 산책시킨다. 대부분의 강아지는 컸는데, 정말 순하고, 짖는 소리 한 번을 1년 간 들어본 적이 없다. 한국의 주인 분들도 배웠으면 했던 태도.
제발 목줄은 짧게, 휴대폰과는 잠시 거리를 두시길. 건너편에서 사람이 오면 강아지를 바깥쪽으로 두고 다리로 막으며 가는 거랍니다. (사실 나는 1시간 전에 목줄 없는 강아지에게 쫓겨서 화가 조금 나있다.)
따라서 나는 독일에 도착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서 강아지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 원래는 건너편에서 산책하는 강아지를 발견하면 20분이 더 걸리는 길이어도 돌아서 갔는데, 독일에선 카페 옆자리에 나만한 강아지가 있어도, 버스에서 발 밑에 강아지가 철퍼덕 누워도 아무렇지 않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생겨나긴 했지만. 아마도 나는 동물 공포증이라기보다, 통제되지 않는 개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고양이. 고양이는 원래도 그나마 덜 무서워하는 동물이었다. 그래도 조금 걱정은 됐었는데, 놀랍게도 독일에서 길고양이를 한 마리도 못 봤다. 다른 유럽 여행지에서도 잘 보지 못했다. 신기하다... 그래서 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동물에 대한 공포를 없앨 수 있었다.
혼자 사는 거, 생각보다 재밌다!
스물셋 1편 마침.
다음엔 독일 본으로의 여행기를 다뤄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