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르니 May 29. 2021

3년에 한 번씩 찾아오는 소녀

네거리 사탕의 진실





마음에 각인되어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는 기억들이 있는데 오늘은 그중 ‘성추행’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려고 한다. 이 이야기가 혹시 불편한 사람들이 있을까 봐 무척 걱정이 되지만, 그래도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다.




출처: https://www.insight.co.kr/news/171860





우리 어릴 적 놀이터에는 꼭 타이어로 둘러싸인 씨름장 같은 흙놀이판이 있었다. 5살인가, 6살 때였나, 동네 놀이터에서 홀로 두꺼비집을 만들며 흙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놀이터에는 흙장난을 하는 나와 그런 나를 멀찍이 벤치에 앉아 바라보는 웬 아저씨 한 명뿐이었다. (아저씨라기 보단 청년에 가까웠다.) 나는 그 시선이 몹시 불편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아저씨를 흘긋거렸다. 나를 한참 빤히 바라보던 아저씨는 갑자기 나에게 잠깐 와보라고 손짓했다. 나는 흙장난을 하다 말고 아저씨에게 다가갔고, 아저씨는 나를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아저씨의 말투가 상냥했는지, 강압적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 동네는 아주 좁은 골목에 다닥다닥 빌라가 모여 있던 곳이어서,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처럼 이웃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그런 동네였다. 그래서 어쩌면 그 아저씨도 내게 익숙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 나는 그 어떤 말대답도, 저항도 없이 무릎에 앉았다. 아저씨는 자신의 상체만 한 자그마한 나를 돌려 앉혀 자신과 마주 보게 했다. (나는 또래보다도 유난히 더 작았다.) 아저씨는 뽀뽀를 하라며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켰고, 머뭇거리는 내 입에 입을 맞췄다. 그러다 일순간 아저씨의 혀가 숙- 하고 내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리고 자두보다 작은 내 입 안을 멋대로 유린했다. 사람이 지나가면 잠시 멈췄다가, 잠잠해지면 다시 시작되었다. 입을 맞추는 거라곤 만나면 반가워서 하는 뽀뽀밖에 모르던, 코딱지나 파먹던 그 아이는 그게 ‘키스’였다는 것을 깨닫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더랬다. 그때 나는 그저 너무 더럽고 이상할 뿐이었다.


어릴 때 나는 화장실을 잘 못 가서 늘 대변, 소변을 꾹 참는 안 좋은 버릇이 있었다. 그날도 그 무릎 위에서 오줌이 마려운 것을 한참 참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저씨는 화장실을 가고 싶다는 나를 데리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인적 드문 수풀 사이에 함께 쭈그리고 앉아 몸을 숨긴 뒤, 아저씨는 나에게 여기서 쉬를 하라고 했다. 여기서?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바지를 내렸다. 내가 쉬를 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아저씨가 함께 바지를 내렸다. 아저씨도 쉬가 마려웠나? 하는 순간, 눈 앞의 광경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아저씨는 오줌이 아니라 우유를 싸는 거지?




출처: https://200315193.tistory.com/m/1925





그 이후의 기억은 필름이 끊긴 것처럼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만, 한참 뒤 나는 아저씨와 손을 잡고 슈퍼에 갔다. 아저씨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네거리 사탕을 사주었고, 나는 사탕을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어디서 난 거냐고 엄마가 물어보면 뭐라고 하지? 혼나면 어떡하지? 그 작은 머리로 한참 고민하다 집에 들어갔는데, 엄마가 하필이면 아주 바빴다. 부산스럽게 집안을 쏘다니는 엄마를 뒤로하고 나는 별말 없이 방에 들어가 앉아 네거리 사탕을 아무와도 나눠먹지 않고 혼자 다 먹었다. 그렇게 그 강렬한 기억은 잊힐 틈도 없이 어린 내 마음에 각인되어 20년이 넘도록 지워지지 않았다.


이 기억은 잊을 만하면 평범한 나의 일상에 3-4년에 한 번씩 찾아와 복기되곤 한다.





출처: https://wooding92.tistory.com/590




성적인 것에 대한 학습이 또래보다 늦었던 나는 내가 아동 성폭력의 피해자였다는 것을 고등학생 때쯤 인지했다. 그때 나를 가장 크게 사로잡은 감정은 '자기혐오'였다. 도움을 청하지 못한 내가 미웠다. 물론 5, 6살짜리 애가 뭘 알았겠느냐만은, 도움을 청하지 못한 내가 너무 미웠다. 이런 일이 있었어,라고 엄마든 아빠든, 손잡고 찾아간 슈퍼 아줌마에게라도 알렸어야 했다. 더 이상 그 나쁜 아저씨를 벌줄 수 없을 만큼 자라 버린 후에 인지했다는 것이 못 견디게 한심했다. 나는 정상적인 어른으로 자랄 수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자리 잡았다.


좀 더 자란 대학생 때에는 이런 사회가 미웠다. 우리 집에서 500m도 떨어지지 않은 동네 놀이터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도, 어린아이를 성적 대상화하는 인간 같지도 않은 것들이 일말의 죄의식 없이 길거리를 활보한다는 것도, 그런 이들이 오늘도 혼자 흙장난을 하는 또 다른 나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때의 나는 매사에 불만이 가득했고, 모든 것에 비판적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날카로움과 예민함으로 불안정한 나를 감추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다.)


현재의 나를 살펴보면, 그때의 기억으로 화가 나거나 슬프진 않다. 다만 약간 속상할 뿐이다. 조금 살아보니, 내 주변 사람 중 사소한 성희롱 한번 경험해보지 않은 여자가 없다는 것, 누군가 내 몸에 손을 함부로 대거나 입을 맞추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몸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것, 그리고 이렇게 다 커버려서도 성추행을 당할 때마다 덜컥 겁부터 나서 얼어붙어버리고 마는 것,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피하고 숨는 것, 뭐 그런 것들이 조금 속상하다.





괜찮을거야.




그렇게 5살짜리 소녀는 3-4년에 한 번씩 나타나, 때로는 이성적으로, 때로는 감성적으로 나를 흔들어 놓곤 했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분노를 쏟아내기엔 지쳤고, 엉엉 울어버리기엔 너무 무뎌져 버렸다는 사실이 씁쓸할 따름이다. 유치하게도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어린 나의 손에, 대가처럼 100원짜리 네거리 사탕을 쥐어 돌려보낸 그 사람이, 지금은 꼭 불행하고 비참하게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었으면 좋겠다.


이 경험을 어떤 온도로 적으면 좋을까, 오래 고민했다. 느닷없이 청승을 떨고 싶지도 않았고, 비슷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에게 조언을 해줄 만큼 나는 성숙하지도 못하다. 다만, 언젠가는 꼭 한번, 내가 겪었던 일들에 대해 담담하고 차분하게 적고 싶었다. 결코 가볍게 적을 수 없는 일이지만, 회피만 하기에는 어린 나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돌이킬 수도, 해결할 수도 없는 일이고, 무엇보다도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올해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 이 아이에게, 몸만 자라 버린 어른 아이가 된 오늘의 내가 해주고 싶은 이야기를 해주고자 한다.




"20년이 지난 너는, 자주 우울한데, 가끔은 웃음이 터지고, 대부분 진지한데, 때로는 아주 엉뚱해. 세상은 여전히 절망적인 일들로 가득하지만, 가끔은 살아갈 의미가 생기기도 하지. 내일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아주 드물게 눈뜨자마자 설레는 날도 있어. 지금 탄 버스가 이대로 사고가 나버렸음 싶다가도, 차창 밖 날씨가 좋으면 또 신나는 노래가 듣고 싶어지기도 해. 너는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아프기도 하다가 건강하기도 하지.

그러니 걱정 말고 또 찾아오렴. 너는 점점 더 괜찮은 어른으로 자랄 거야."




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우주는 관대하지 않았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