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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르니 Apr 11. 2021

내가 요새 건강하다는 증거

그리움



하루를 살며, 혹은 일주일, 한 달을 살며 나에게는 그 기간의 주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 누구나 한 가지 감정만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과 생각을 하며 살지만, 그래도 가장 크게 차지하는 감정이나 생각이 늘 있다. 어느 때는 우울이었고, 어느 때는 분노였고, 어느 때는 즐거움이었겠지. 요새 나의 주 감정은 ‘그리움’이다.





가장 그리운 건 사실 제주도




주중에는 주말을 그리워하고, 직장인일 때는 학생일 때를 그리워한다. 혼자 밥을 먹을 때면 엄마의 미역국을 그립고, 비행기가 타기 어려워진 요새는 치앙마이가 그립다. 그리고 매일매일 제주도가 그립다.  그리움은 사실 나에게 낯선 감정이 아니라 늘 소소하게 존재해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새 주 감정까지 이 녀석이 치고 올라온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이 좀 그리워졌다. 요즘 부쩍 전 남자 친구가 보고 싶다.



나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참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향한 애타는 마음이 나는 늘 좀 별로였다. 그게 어쩌면, 나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버림받아본 적이 없어서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나는 늘 먼저 버렸다. 마음속에 삼진아웃을 만들어놓고, 아웃이 되면 가차 없이 버렸다. 그리고 그 삼진을 나의 관용이라고 생각을 했다. 이 말이 텍스트로 보면 건방져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내 마지막 발악 같은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나는 이성적인 것에 대한 강박이 있어왔다. 그래서 남자 친구에게서 어떤 미운 점이 보이고 나면, 그 순간 모든 미래가 그려졌다. '이야기하겠지, 기분 상하겠지, 싸우겠지, 실망하겠지, 원망하겠지, 그리고는 후회하겠지' 하는 일련의 생각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난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관계를 지속하고자 하는 의지가 사라진다. 삼진아웃은 그런 나 자신이 너무 싫어서 '3번은 견뎌보자, 나도 부족한 사람이니 3번은 틀릴 수 있어.'라고 내가 나를 설득하는 과정이었고, 인간적이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그런데 첫 직감은 여태껏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늘 그렇듯 같은 문제가 3번 반복되었고, 그래서 이별이라는 선택이 지금도 결코 후회스럽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새 왜 자꾸만 그리울까, 그렇게 정이 다 떨어져 놓고 왜 보고 싶을까 생각해보면, 나를 많이 사랑했던 그 눈을 보고 싶다. 싸우고, 지치고, 너덜너덜해지다가도, 그 어떤 한순간에, 그가 나를 쳐다보는 눈빛에서 ‘이 우주에 네가 있어서 나는 참 행복해.’라고 이야기하는 거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다. 

우울과 상실 속에 갇혀 있을 때는 감각이 완전히 차단되어 추억 같은 것을 떠올릴 조금의 여유도 없었다. 그런데 요새 잠도 잘 자고, 밥도 잘 먹고 지내다 보니 우울이 빠져나간 공간에 추억이 차오른다. 특히 20년이 넘게 나조차도 찾지 못한 ‘나의 존재 가치’를 꿀이 뚝뚝 떨어지던 그의 눈빛에서, 내가 먹는 거만 봐도 기뻐했던 그의 웃음에서 찾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꿀떨어지는 눈빛. jpg (출처: KBS2 유희열의 스케치북)



물론 그를 열심히 미화하던 감성에 그의 치명적인 단점 몇 가지를 떠올리는 찬물을 끼얹으면, 금세 감성에서 깨어 나올 수 있다. (그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단점들이 꽤 많았다.) 나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꽤나 시니컬하고, 영원한 것을 없다는 비관론자이다 보니, 그를 그리워하는 시간은 절대로 10분을 넘기지 않는다. 그러나,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적 없는 내가 요새 그가, 아니 그의 눈이 조금 보고 싶은 걸 보면, '많이 건강해진 게 맞구나.'하고 조금 안심이 된다.



우울증이 낫는 것에는, 감기가 낫는 것처럼 콧물이 멎거나, 기침이 멎는 것이 없으나, 이런 걸로라도 단서를 찾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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