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의 문예 이론] 감상
들어가며
사실 책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에 앞서 다가오는 개념이 부족하여 애를 먹을 것이 사실이다. 감상문이 감상문의 수준에서 그친다면 다행이겠지만, 필자 스스로 추구하는 것이 감상 그 이상이었던 점을 고려해볼 때 이번 독서는 어떠한 충격에 가까웠다. 이 시점이 많이 늦은 감도 있었지만, 평소 문예이론에 관심을 두지 않은 독자이고, 학생이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번 독서가 폭넓은 벤야민의 사고처럼 폭넓은 독서를 위한 첫 걸음의 의미가 있었다고 본다. 벤야민의 사유가 모호하게 느껴지는 것은 막연한 독서를 한 이유도 있겠거니와 전문적인 배경 지식의 부족 때문으로 여겨진다.
매번 이론서와 철학서를 가지고 이런 핑계를 대는 것이 스스로 자책스럽게 느껴지지만, 이것이 이번 독서의 최대 교훈이 아니었나 싶다. 이런 연유로 벤야민의 문예이론 감상은 단편적으로 끝마칠 수준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단편적인 감상으로 이 글을 끝마치는 데에 약간의 죄책감과 허탈함을 감추고자 평소 관심을 두었던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 개념을 참조해 보았다. 즉, 필자는 벤야민의 문예이론 중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과 생산자로서의 작가에 집중하다보니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의 개념과 현대인의 소비성을 비교 분석해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착상에 접근했고, 미약하나마 그 분석을 이 글에 실현해보고자 했다.
앞서 <문예 비평> 부분을 간략 요약하자면 사실 단편적인 감상에 지나지 않는다. 한 편의 비평을 요약하는 데에 한계도 느꼈으며, 요약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너무 광범위하게 기술되어서 요약다운 요약에 실패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일단 독서를 끝마친 후 각 부분에서 가장 크게 느꼈던 부분을 서술하고자 한다.
“서사극이란 무엇인가”의 부분에서는 서사극과 관객과의 관계 부분을 의미 있게 보았다. 서사극은 긴장을 풀고서 이완된 상태에서 사건의 진행과정을 쫓아가는 관객을 원한다는 사실과 이유 없이는 생각하지 않는 관객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 이를 바탕으로 브레히트는 단순한 연극의 교양적 요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 의지를 투영했다는 점이다. 즉 브레히트의 사상은 관객의 감정적인 반응을 차단하고, 기존 연극과는 다르게 극 흐름에 대한 공감을 막으며 연극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연극의 주제를 심사숙고하게 하여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 주제에 대하여 지적인 판단을 내리도록 유도하는 서사극의 의미를 판단할 수 있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부분에서는 카프카의 세계를 표현한 부분에 집중하였다. 전통적인 개념이 카프카의 작품 세계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 확인하는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카프카는 인간의 몸짓으로부터 전통적 토대를 탈취하고는 그 토대에서 끝을 모르는 성찰의 대상을 취했다는 작품 세계관을 생각할 수 있었고, 카프카의 경험 가까이에 있던 것은 오로지 카프카가 심취하고 있는 전통뿐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프루스트의 이미지”에서는 프루스트가 일말의 형이상학적 관심도 없이, 일말의 인위적 구성의 경향도 없이, 또 자위하려는 일말의 경향도 없이 체험에 접근하고 있다는 프루스트의 작품관을 생각해 볼 수 있었고,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해서” 부분에서는 정보에 대한 개념에 집중할 수 있었는데, 정보는 독자들의 경험 일부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지 못할 뿐 아니라 신문의 어투 역시 독자들의 상상력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벤야민과 보들리야르(1) -아우라와 시뮬라크르
벤야민은 그리스인들이 대량으로 생산해 낼 수 있었던 예술작품은 고작해야 청동제품, 테라코타와 주화 정도였다고 기술했다. 그 밖의 것들은 모두 일회적인 것이었고, 기술적으로도 복제가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허나 19세기 말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사진예술과 영상매체가 전통적인 예술의 기능과 개념에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이것은 예술사에 결정적인 전환을 불러왔다. 이렇듯 시대는 변화의 국면에 맞았고, 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해 낼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새로운 형태로 시장에 내놓을 수도 있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 복제기술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아무리 완벽한 복제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 가지 요소가 빠져 있다고 보았다. 그 요소는 시공간에서 예술작품이 갖는 유일무이한 현존성, 즉 원본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 예술작품이 지니는 일회적 현존성이다. 이는 복제품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벤야민은 원작이 갖는 ‘아우라(아무리 가까이 있다 해도 거리감을 지닌 독특한 현상)’의 개념을 도입하여 이것을 설명하였는데, 기술복제가 가능해진 현대에는 이런 예술의 신비한 분위기는 갈수록 파괴된다는 것이다. 즉 전통적인 예술의 순수성과 성격은 상실된다고 본 것이다. 즉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는 아무리 완벽하다 가정해도 원작 그대로의 느낌은 살릴 수 없고, 또한 원작의 아우라도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어서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 개념을 살펴보고자 한다. 보드리야르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던 프랑스와 유럽에는 68운동이라는 큰 사건이 지나갔다. 즉 보드리야르의 이론은 사회적인 배경을 따라 소비 시대에 대하여 분유와 평등, 욕구 분출의 과정이 산업자본주의의 흐름 위에서 생성되었다. 이런 보드리야르 개념은 ‘시뮬라시옹’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시뮬라시옹은 장 보드리야르 이론의 핵심인데, 시뮬라시옹을 이해하려면 시뮬라크르라는 실재가 필요하다. 나는 시뮬라시옹을 시뮬라크르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쉽게 이해했기 때문이다. 시뮬라크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 놓은 인공물이다. 우리 주변에는 수많은 시뮬라크르가 존재하고, 그 시뮬라크르라는 모방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낸다. 현실은 시뮬라크르라는 이미지에 의해 지배받게 되므로 시뮬라크르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모습이 되는 것이다. 이를 하이퍼리얼리즘이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즉 벤야민의 ‘복제품’은 예술의 신비한 분위기가 파괴된 완전하지 못한 실재라는 것을 강조했고, 보들리야르는 복제된 것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하이퍼리얼리즘을 강조했다. 필자는 이 오묘한 차이를 벤야민과 보들리야르를 가를 수 있는 주요 개념으로 판단했다. 즉 벤야민은 전통예술이 지니고 있던 아우라가 기술복제가 가능한 현대에는 상실된다는 것이고, 보들리야르는 현대의 시뮬라크르가 인공물의 차원을 넘어 실제보다 더 실제로 기능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벤야민과 보들리야르의 개념은 상통할 여지가 충분히 많다. 벤야민은 대중은 바로 자기 옆에 가까이 있는 대상들을 그림을 통하여, 아니 모사와 복제를 통하여 소유하고자 하는 간절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는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의 힘과 상통한다. 보드리야르 이론에 따르면 대중들은 복제된 같은 브랜드의 상품을 선호하고, 어쩌면 광적으로 집착하기도 한다. 이렇듯 복제기술의 발달은 사람들에게 소유의 욕망을 불러일으키게 된 것이다. 또한 벤야민은 사진의 원판으로부터는 여러 개의 인화가 가능하며 어느 것이 진짜 인화냐고 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다. 이미 대중들은 원본이 사라진 시대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보들리야르가 말한 시뮬라시옹의 개념과 상통한다. 원본은 대중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다만 대중들은 어떠한 복제된 이미지를 추구할 뿐이다.
벤야민은 영화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영화에서 보이는 환상적인 성격은 이차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데, 그것은 편집의 결과로 생겨났다는 것이다. 이런 편집의 개념은 보들리야르의 이론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보들리야르는 영화 속 비현실이 편집을 통해 재생산되며, 이런 영화 속 비현실은 현실보다 더 많은 신뢰성, 정확성의 차원에 속해 있다고 보았다. 벤야민이 말한 영화 속 환상적인 성격과 보들리야르가 말한 영화 속 비현실이 어느 정도 교류되고 있는 개념이라는 것을 판단할 수 있다.
벤야민과 보들리야르(2) -생산성과 소비성
벤야민은 생산이론이라는 새로운 문학이념을 제시함으로써 현대문학의 이론과 실천을 새로운 단계로 이르게 했다. 생산이론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문학이 현실을 반영하는 요소로 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활동, 즉 사회적 경제적 생산의 한 형태로 이해코자 한 것이다. 이는 곧 예술이라는 것은 반영이나 재현이 아닌 생산의 산물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현대에 들어선 예술가들은 자본주의의 생산수단, 즉 텔레비전, 신문, 잡지 등과 일정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고, 이러한 대중매체를 어쩔 수 없이 이용해야 하는 사정에 처했다. 이런 생산과정에서 예술가들은 자신의 지적 생산물을 기계적으로 재생산해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벤야민은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관계 속에서 예술가들은 자신의 사회적 입장이나 정치적 위치에 대해서는 거의 인식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있다. 즉 생산관계 속에서 수동적으로 예속된 예술가들의 위치와 사상을 새로이 인식시켜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보들리야르는 현대인들의 소비성에 집중하였다. 즉 보드리야르는 생산성을 중시하였던 벤야민과는 다르게 생산 관계보다 사물의 기호학적 가치, 즉 소비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현대인들이 사물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기호를 소비한다고 말한다. 사물의 직접적인 기능보다는 그 이미지를 사고 싶어 한다는 뜻이다. 현대 사회는 생산과 노동에 의해 발전되는 것이 아니라 소비에 의해 확장된다고 제시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사물이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기호가 소비된다는 것이다. 사물의 기능을 기호로 파악한 보드리야르 특유의 기호학적 사유가 깔려 있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상품을 필요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으로 여기고, 생산자 또한 그것을 이용하여 생산한다고 하였다. 즉 상품의 사용 가치보다는 상품의 기호 가치를 더 강조한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소비 사회에서 자신의 욕망과 개성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자신의 삶에서 자유롭게 향유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한다. 그렇지만 보드리야르는 그 부분을 냉정하게 지적하고 있다. 우리가 가진 욕구와 그것의 충족은 오늘날에는 다른 생산력과 마찬가지로 강요되고 합리화된 생산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생산자들의 목적과 의도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이 되어간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벤야민은 생산자로서의 작가가 지녀야 할 것들을 강조한다. 즉 적극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는 실천적 작가, 즉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신적 생산자를 출현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진정한 혁명적 예술가는 자본주의 사회 하의 예술적 생산력과 생산관계를 어떻게 발전시켜야 할 것인가를 주목해야 하며, 이를 어떻게 예술상황 자체에 적용시키느냐 하는 점을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듯 벤야민은 혁명적인 예술가들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런 예술가와 수용자 사이에는 창조적인 사회관계가 수립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벤야민의 입장인 것이다. 이는 곧, 복제의 힘을 이길 수 있는 생산관계 속 혁명적 예술의 힘을 강조한 것이다.
반대로 보들리야르가 주시한 것은 현대인들의 욕망, 즉 소비적 종교성이다. 보드리야르는 욕망 체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헛된 소비성을 이야기한다. 우리들은 스스로 현대인들의 욕망, 욕구, 본능을 이용한, 그들의 소비성을 이용한 많은 일들이 아직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속에서 우리가 결정지어야 할 것은 헛된 허영에서 멀리 떨어져가는 소비성을 되찾는 일일 것이다. 즉 보드리야르는 현대인으로서 살아가는 개개인들이 소비적 위치에서 스스로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며
필자가 벤야민의 문예이론에서 이 부분을 강조한 이유는 사실 평소 보들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 큰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허영된 소비적 종교성과 복제품의 과현실적 요소는 습관이 되고, 적응해버린 소비자, 즉 현대인들의 사고를 단순화시킨다고 판단을 했다. 현대인들은 자본사회에서 상품과 너무나 친숙해졌고, 너무나 자연스러운 시각으로 그것을 바라보게 된다. 또한 그것은 예술과 대중매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벤야민은 그런 소비를 하는 소비자 이전에 생산자로서의 기능을 말하고 있다. 이는 또 다른 국면에서 충격이었고,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그 의미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올바르고, 진실된 교류가 진정한 예술의 발현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보들리야르의 개념을 참조한 벤야민의 문예이론 감상의 한줄 평이 아닐까 싶다. 또한 그러한 이유로 벤야민의 사유 중에서 이 부분이 가장 가까이 다가온 것이 아닌가 싶다.
물론 벤야민이 말하는 예술적 생산성과 보들리야르가 말하고 있는 사회 문화적 소비성을 대조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예술이 문화의 범주 안에서 활동하고, 문화가 예술처럼 이데올로기 안에서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점에서 둘의 개념은 폭넓은 시야에서 함께 해석될 수 있음을 생각했다. 다만 필자 스스로 다소 무리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둘의 개념이 더욱 깊숙한 곳을 향하고 있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런 단편적인 비교를 통해 벤야민의 사유에 조금이나마 더 접근을 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보들리야르의 개념을 참조하며 흥미를 느꼈다. 앞으로 점점 더 깊숙한 사유로 향할 수 있도록 벤야민의 도움을 많이 받아야 할 것이다. 그 첫 단추로서 이 글의 의의가 있었다고 판단을 하며 본 감상문을 마치려 한다.